[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원삼(圓衫)에 깃든 한국인의 정신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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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3   |  발행일 2020-10-23 제38면   |  수정 2020-10-23
꽃가마 타고 입고온 평생 가장 빛난 예복…마지막길 다시 꺼내 입고 떠나다
신부가 혼례식때 입는 복식 원삼·활옷
소매끝 색동·한삼 이어붙여 우아한 美
시집으로 들어온 후 장롱속 고이 보관
살아서도 입고 죽어서도 입는 최고 '禮'
곱디고운 어머니와 평생한 세월 존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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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그레타 리가 만든 평양 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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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민이 디자인한 전라도 원삼.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고요했다. 더위를 식힌 가을의 날씨는 알맞게 서늘해서 햇살이 어깨를 간질이며 내려앉는 것이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했다. 코로나의 예리한 발톱도 조금은 무디어진 듯 삶이 잠시나마 평온하고 가지런해지는 것 같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모처럼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행복한 결혼식의 축하를 위해서 일찍 서둘러야 했다. 운전을 하며 가는 길의 가을 경치와 아름다운 신부와 신랑의 모습을 상상하며 토요일의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의 시간은 한 통의 전화로 바뀌었다. 그동안 면회가 봉쇄되어 있던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서 찾는 전화였다. 코로나 이후 매일 찾아뵙지 못했던 어머니는 병상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온몸에 링거바늘 자국이 희디흰 피부의 곳곳에 푸른 멍을 수놓고 있었다. 곱던 이마에도 푸른 바늘 꽂은 자국이 남아있다. 늘 마음의 준비를 하였지만 죽음은 이렇게 느닷없는 것이 되었고 코로나로 외롭게 견디었을 그 시간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어머니 여의고…

황망하게 어머니를 여윈 것이다. 온몸의 살갗들이 비늘처럼 일어나 사이사이 소금을 흩뿌리고 지나가서 통증조차 가늠할 수 없는 가슴 저미는 슬픔이 해일처럼 일었다. 슬픔의 곡이, 뜨거운 눈물이 세상의 고요와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돋아 오르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꽃으로 장식한 관 안에 어머니의 수의는 회색빛 저고리였다. 평소에 절에 다니면서 입던 옷이었다. '내 죽으면 이 옷을 입혀 달라'고 하신 유언을 따랐다. 그 옷을 입고 죽어 다음 생에는 스님이 되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5남매를 키우시느라 늘 고단하고 바빴던 일생에서 고요히 정진하는 스님의 모습이 어머니에게는 이루지 못한 꿈이셨나보다.

급히 달려간 병원의 병상에서 손에 놓지 않았던 맨들하게 윤이 나는 염주알에 아직 어머니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곱게 화장으로 단장한 뒤에 꽃이 가득한 관 안에 뉘어지는 시신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이제야 꽃가마를 타고 편안한 곳으로 가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바랜 어머니의 사진첩에는 '이성지합 백복지원(二姓之合 百福之源)'이라는 수 글씨가 선명한 혼례복을 입은 어머니가 서 있다. 결혼은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숭고한 일이었기에 그날만큼은 신부나 신랑은 최고의 예로서 대우했다.

조선시대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에 이런 대목이 있다.

'유독 혼례에 사서인(士庶人)이 섭성(攝盛)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므로 신부가 혼례복으로 대군, 왕자의 처인 외명부 1품복, 즉 가체와 홍삼(紅衫)을 사용한다.'

즉 혼례에 있어서만은 일반백성이라도 궁중의 복식을 따르는 '예를 한 단계 높인 존귀한 예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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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상주 한복진흥원 전시관에서 프리뷰로 열린 경북문화재단 산하 한국복식학회 주최 팔도 원삼전 행사장 내부. 오는 11월6일 개관전 오픈.

◆원삼과 활옷

이처럼 신부가 입은 혼례에 입는 복식으로는 원삼(圓衫)과 활옷(闊衣)이 있다. 활옷에는 생명 탄생의 의미를 기원하는 길상문들이 많이 수놓아져 있다. 동자무늬, 구봉무늬, 연꽃무늬 등이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가지 복의 근원이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것에 있었음이다. 더불어 풍요를 기원하는 모란문이 활옷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혼례복으로 자수를 중심으로 한 활옷보다는 원삼을 보편적으로 입었다. 자수가 많이 들어가는 활옷은 서민들에게 있어서는 제작이 까다롭기 때문에 원삼을 주로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1925년 김숙당이 쓴 '조선재봉전서(朝鮮裁縫全書)'에도 원삼 만드는 법이 자세히 나와 있어서 집에서 제작이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현존하는 유물의 수량만 보더라도 원삼이 활옷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다. 원삼은 다양한 비단천의 배합으로 강렬하고 아름다운 혼례복의 특성을 살리며, 지역적으로 조금씩 다른 색감을 보여준다. 소매 끝에 색동이나 한삼(汗衫)을 이어 붙여 우아한 아름다움을 더했다. 원삼은 직선의 조화와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화려하면서도 단아함을 잃지 않는 한국미의 독특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옷의 선은 정신의 숨길을 드러낸다. 그래서 얼굴을 감싼 부분은 단정한 정신을 드러내는 까닭에 심지를 단단하게 쓰며, 바람을 스치게 놓아두어야 하는 치맛자락에는 시접을 부드럽게 쓴다. 이러한 원삼의 지역적 특성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지난15일 상주 한복진흥원 전시관에서 열렸다. 〈사〉한국복식학회(KOSCO전, 10월15~30일)에서 주최한 이 전시회에 함흥, 개성, 평양, 전라도, 충청도 등 지역적 특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녹원삼, 청색원삼, 황원삼 등의 다양한 원삼들이 한꺼번에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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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수의로도 사용된 원삼

이처럼 혼례에 주로 입었던 원삼은 수의(壽衣)로도 사용되었다. 이성지합의 혼례가 끝나면 장롱 속에 수십 년을 곱게 넣어두었던 원삼(圓衫)을 다시 꺼내 입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원삼이 염습시(斂襲時)에 착용된 예로는 17세기 1631년 동래 정씨묘 수의에 원삼을 입은 예가 출토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뒤 해평 윤씨(1660~1701)의 묘에서도 원삼이 수의로 사용된 출토복식으로 나왔다.

그 외에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가례집랍(家禮輯覽)'에도 혼례 때에 입던 옷을 장삼(長衫)을 여성의 습구(襲具)로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다.

'원삼'이라는 명칭은 15세기부터 기록에 보이는데 양성지의 '눌재집(訥齋集)'이 그것이다. 양성지는 1415년부터 1482년에 살았으므로 1400년대에 원삼이 등장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원삼은 상장례(喪葬禮)의 예복으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옷이었다. 국장도감의궤, 빈전혼전도감의궤 등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특히 1620년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는 여자의 염습의를 원삼(圓衫), 몽두의(蒙頭衣), 장오자 중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국속(國俗)을 수용할 것을 권하였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수의로 양반들은 관복을, 선비들은 심의를, 남자들의 경우는 도포나 두루마기를, 여자들의 경우는 원삼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는 혼례복으로 죽어서는 수의로 입은 원삼과 활옷의 의미를 어머니의 여의고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화려한 복식을 금지시켰던 다양한 복식금제가 있었던 조선시대였지만 혼례와 장례에서만은 최고의 예로서 존귀하게 치렀던 전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은 것일까?

여고 시절 수업이 끝난 늦은 시간 어두운 골목길에 지켜 서서 내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던 어머니의 음성을 이제 더는 들을 수 없다.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눈물 속에서 이제 내가 어머니의 이름을 한없이 부르며 서 있다.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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