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강릉 노추산과 안반데기...하늘 아래 첫마을, 만추의 파노라마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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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20   |  발행일 2020-11-20 제36면   |  수정 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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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전망대 가는길에서 본 안반데기 풍광.
'인문학 聖地'로 불리는 노추산
맹자와 공자 國名서 이름 유래
단풍 곱게 내려앉은 3천개 탑
26년 애끓는 母情 고스란히…

구름도 쉬었다가 가는 운유촌
해발 1100m에 60만평 채소밭
낮과 밤의 거대한 우주 전망대
대관령서 강릉까지 한 폭 그림


◆노추산

세월교를 건넌다. 다리 저쪽은 인문학의 성지(聖地) 노추산(魯鄒山) 들머리다. 여기도 가을 단풍의 데자뷔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황홀하다. 앙다문 숲의 입술에도 가을의 서정이 흐른다.

한줄기 갈바람이 추억을 흔들며 불어온다. 와락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숲의 적막. 그 어디메 낙엽을 헤치고 시나브로 다가오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 2대 8의 가르마로 흐르는 송천. 황금분할인 숲의 아름다움, "가야 돼, 가야 돼. 와우 와 우." 조원희의 세리머니가 환청으로 들린다.

히어리의 노란 단풍이 강물 되어 눈가로 끝없이 흐른다. 금강송과 단풍나무가 즐비한 감탄의 돌탑길이다. 구도장원비(九度壯元碑)가 나온다. 이 비석은 조선 선조 때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한 율곡 이이가 노추산에서 학문을 닦으며 쓴 글을 새긴 돌이다. 이 비문을 보면 관운이 있다 하여 많은 유생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의 산중(山中)이란 시(詩)가 불현듯 떠오른다. "採藥忽迷路(약초를 캐다가 문득 길을 잃었는데), 千峰秋葉裏(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었네), 山僧汲水歸(산승은 물 길어 돌아가고), 林末茶烟起(숲 끝에 차 다리는 연기가 피어나네)."

가을산과 약초 산승이 모티브를 이룬 명시다. 노추산은 신라의 대유학자 설총과 조선조 이이 선생이 입산 수학한 곳이다. 유학의 아이콘은 공자와 맹자다. 소위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학문의 오마주인 그분들, 두 분의 모국 공자의 노나라 맹자의 추나라 국명을 따 노추산(魯鄒山)이 되었다.

산명(山名)이 그윽하다. 노추산에는 설총과 이이의 위패를 모신 이성대가 있다. 지나가는 여행객과 대기리 주민이 쌓은 돌탑 길을 걷는다. 숲에 가려 숨었던 송천이 보인다. 어디서 산새가 곱게 흘겨 운다. 물은 왈왈 글 읽는 소리로 흐른다. 여울 빠른 물살에 떨어져 흘러가는 단풍. 시간의 물살에 떠밀려 지나가는 나의 인생. 앞에 목교가 보이고 여기부터 차순옥 할머니가 옴니암니 쌓은 돌탑으로, 돌의 숫자와 이름은 차순옥 할머니가 기도하며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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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간 3000개의 돌탑을 쌓은 차순옥씨의 움막.
차 할머니는 강릉으로 시집와 슬하에 4남매를 두고 지냈으나 언제부턴가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흰 수염의 산신령이 나타나 노추산 계곡에 3천개의 돌탑을 쌓으면 우환이 없어진다는 신비한 꿈을 꾸었다. 노추산에 돌탑을 쌓을 장소를 찾던 중, 율곡 이이의 학문이 서려 있는 이곳에 1986년부터 돌탑을 쌓았다. 오로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내속의 돌을 캐다가, 뼛속까지 울리는, 그 돌의 종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2011년 9월 향년 66세로 타계할 때까지 26년간 3천개의 돌탑을 애면글면 쌓았다.

계곡가 양쪽으로 균형 잡힌 돌탑이 아름답게 서 있다. 단 한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할머니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그분의 염원 기원이 서려 있는, 믿기 어려운 감동의 돌탑 군을 지나며, 가위눌리는 걸음마다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다. 만산홍엽에 꿈을 꾸는 돌탑이 나를 초혼한다. 그 시간 숲에서 나는 단풍멀미를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늘 기도를 하였다. 돌을 향한 기도는 영원을 향한 기도다. 차 할머니의 돌탑은 하늘을 오르고, 무수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새벽녘이면 장독대 정화수에 내려와 어머니의 비손으로 이어져 새로운 기도가 된다. 그분이 돌탑을 쌓을 때 묵었던 움막에 도착한다. 여느 돌탑군보다 더 큰 신비의 돌탑군 공간에 움막이 있다. 움막은 얼마나 협소한지 한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크기다. 차순옥 할머니를 기린다. 가족의 무사편안을 기원하던 지극한 정성과 열정이 기적을 만든 곳. 여기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만난다. 한 바퀴 돌아나간다. 목교까지 와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간다. 송천이 보인다. 송천 1급수 물에 산다는 산천어, 열목어, 버들치, 갈겨니, 금강모치, 은어, 쉬리, 퉁가리 이름을 중얼거려 본다. 그 아름답고 맑은 눈의 물고기들이 돌탑으로 모였다가, 차순옥 할머니가 계신 하늘나라까지 곰비임비 헤엄쳐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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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반데기의 멍에 전망대.
◆안반데기
노추산 돌탑길의 감동을 간직한 채 인근 왕산 안반데기 운유촌 마을에 도착한다. 구름 위의 땅 안반데기, 하늘과 맞닿아 하늘의 마을이 된 운유촌, 구름 위를 거니는 트레킹의 출발 장소다. 해발 1천100m이며 국내에서 주민이 거주하는 가장 높은 지대다. 여기에 약 60만평의 고랭지 채소밭에 28 농가가 살고 있다. 게다가 수십 기 풍력발전기가 쉭쉭 깊은 날숨을 토해내는 경관은 벅찬 아름다움으로 황홀하다.

안반데기는 떡메로 떡쌀을 칠 때 쓰는 '안반'처럼 생긴 '덕'(산위에 형성된 평평한 구릉지대·둔덕)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안반덕'의 강릉 사투리로, '안반덕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전쟁 후 미국의 원조 양곡을 지원받아 개간이 시작되어 1965년을 전후하여 마을이 개척되었다. 1995년 주민들이 개간된 농지를 불하받으면서 완전히 정착하였다.

고갯길 피득령에 올라 먼저 멍에 전망대로 간다. 가을하늘에 둥실 떠 있는 눈부신 흰 구름, 탁 트인 조망,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별천지 같은 풍광에 거듭 감탄한다. 바로 가면 고루포기산으로 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걸어 멍에 전망대에 오른다. 일망무제, 대관령 쪽으로 산의 파노라마가 물결치고 그 아련한 산 그림자 가뭇없이 하늘로 흘러간다. 멀리 강릉시가지가 보인다. 뷰 포인트다. 세찬 바람이 이어져 여기가 바람의 나라임을 안다. 옥녀봉 방향에도 산비탈 채소밭이 장엄한 풍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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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반데기의 또 하나 브랜드인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가까이서 장관을 이룬다. 우두둑우두둑 들려오는 풍력발전기 회전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내면의 깊은 우물에서 무언가가 올라와 꺽꺽 울대에 걸린다. 미움도 사랑도 아닌 것, 그 알 수 없는 신비한 감정으로 얼굴이 경련으로 파닥인다. 걸어온 길을 돌아가 피득령에서 옥녀봉으로 걷는다. 바람은 여전히 세차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에 있는 시를 읊어본다.

"나였던 그 아이 어디에 있을까? 아직 내 안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우리에게는 천진난만하고 호기심에 눈 반짝이던 '어린 시절의 나'가 있다. 일출 전망대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내 안에 항상 남아있던 그 아이를 점자처럼 더듬어 보고, 현실과 환상 속에 찾아온 가을의 안반데기, 그 천진난만한 비경에 연거푸 찬탄사를 뱉는다. 일출이 눈부신 고랭지 채소밭의 하늘 전망대, 지금은 희미한 낮별과 반달도 보인다. 그러나 밤이 오면 이곳은 별과 은하수의 촬영지로 둔갑한다. 별이, 온 세상의 별이 마치 다 있는 것 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 바로 별과 은하수 촬영의 포인트다. 안반데기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 촬영은 사진작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출사지로 손꼽히고 있다.

일출 전망대와 풍력발전기 밑을 지나서 경사길로 내려간다. 우주를 걷는 기분이다. 벤치쉼터에서 숨을 고른다. 천상의 트레킹 오브제, 이 말이 적정하다. 정자쉼터에서 한 번 더 쉬고 피득령으로 회귀한다. 바람의 시간 바람의 땅 안반데기, 하늘과 낮별 낮달의 우주공간, 감동의 파노라마가 허공으로 그망 없이 흘러가던 트레킹. 주민들의 바튼 삶과 억척이 일군 채소밭. 산그리메가 실루엣을 그리는 몽환의 강릉 바우길 17구간, 그 아찔한 비대면 언택트 트레킹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어둠이 급히 내려온 귀갓길에 별과 은하수를 본다. 저 별이 빛나는 밤에 나는 고흐의 인상파 그림으로 안반데기를 호출한다. 우리는 별이 되고 은하수가 될 수 없을까. 영적 에너지가 정말 될 수 없을까. 참 그로데스크 한 밤이다. 다음날이 오면 또 다른 트레킹 로드를 찾아가는 '자 떠나자'라는 환호를 나의 내면에서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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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강릉 노추산 힐링 캠프(010-6375-3333), 안반데기 (033)655-5119
☞ 주소 :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산 716(노추산 모정탑길)
☞ 트레킹 코스 : 노추산 모정 탑길 : 세월교 - 목교 - 움막 - 세월교
☞ 주위 볼거리 : 오죽헌, 정동진 해변, 하슬라 아트월드, 대관령 박물관, 가리왕산 휴양림, 낙가사, 오대산 국립공원, 허균 생가터, 경포대 해수욕장.

글=김찬일<시인·대구힐링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여행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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