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세상보기] 고향 오일장에서

  • 천윤자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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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2-22   |  발행일 2020-12-23 제11면   |  수정 2020-12-23
천윤자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1천명을 넘어선 지난 13일 경북 경산 자인전통시장에 갔다. 전통시장은 열린 공간이니 동네 마트보다 안전지대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계정숲 어귀에 들어서자 도로변에 주차된 차들이 즐비하다. 멀찌감치 주차하고 걸었다. 도로변엔 시골 어른들이 들고 온 농산물로 난전이 펼쳐지고, 트럭을 몰고 온 외지 상인들의 차량 위에도 배추며 과일이 가득하다. 난전은 옛 청과시장 앞에서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제법 길게 이어진다.

자인장은 필자에게 여느 시골전통시장이 아니다. 유년의 기억이 펼쳐지는 고향장이다. 그래서 마음이 울적해지거나 어깨에 힘이 빠질 때면 저절로 발길이 향한다.

자인장의 명물로 간갈치와 돔배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간갈치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어물전 옆 제법 넓게 자리 잡은 그릇점에는 냄비, 접시, 바구니 등 갖가지 생활용품이 수북이 쌓여 있고 무쇠솥도 보인다. 가업을 이어오는 어릴적 동무가 주인으로 앉아 있다.

어느덧 반백이 넘은 그의 모습은 아버지를 꼭 닮아 있다. '나이롱 그릇집'이라고 적힌 상호를 쳐다보니 20여 년 전 세상 떠난 그의 아버지가 추억 속에서 웃고 계신다. 플라스틱 제품이 시장에서 인기를 끌 무렵 그 어른은 자전거에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바가지를 싣고 다니며 팔았고, 쭈그러진 양은 냄비와 바꿔주기도 했다.

나이롱 바가지를 파는 '나이롱 김씨'라고 당신을 소개하던 사람 좋은 그는 말재간까지 뛰어나 동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 모두 좋아했다. 정월 초순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할 때도 단연 돋보였다.

어느 해는 박제된 꿩을 등에 짊어지고 포수가 되어 곱사춤을 추기도 했고, 어느 해는 한복 치마저고리로 여장을 해 웃음을 주던 유쾌한 분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릇을 싣고 다니던 수십 년 된 녹슨 자전거를 버리지 못하고 가게 뒤편에 세워 두고 있다. 부친은 플라스틱 제품으로 솔솔한 수입을 올렸는데 요즘은 그릇을 사기 위해 전통시장을 찾는 사람이 많이 줄었단다.

자인장은 오래된 역사만큼 대를 이어 오는 가게가 많다. 여든을 넘긴 채소가게 할머니는 자인으로 시집와서 서른한 살부터 채소가게를 했다고 한다. 함께 장사하던 영감님은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고 이제는 둘째 아들과 같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단다. 딸은 건너편에서 따로 가게를 내어 채소를 팔고 있다. 이것저것 나물을 골라 담는데 작고 거친 손이 듬뿍 덤을 얹어준다. 인정에 버무려질 저녁 식탁은 더 푸짐해지겠다.

그 옛날 장터는 우리네 삶의 터전이다. 이웃과 만남의 장소이며 소통의 장소였다. 지은 농산물을 내다 팔고,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오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국밥이나 국수 한 그릇의 인정이 오가던 곳이다. 시장에서 만나 혼담도 오가고 사돈이 되기도 했다.

편리함을 갖춘 대형마트에 밀려 점점 쇠락해 가는 전통시장의 모습이 이제는 꼭 고향집 같다. 허물어지고 남은 한쪽 담벼락에 줄기만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과 가지는 다 잘리고 앙상하게 등걸만 남은 감나무 같다. 노점에 벌여놓은 책들이며 호미, 낫 같은 농기구가 옛 모습처럼 정겹다.

"자인장 하면 바소쿠리 아이가. '자인장 바소쿠리'라는 말도 모르나. 지게에 얹어서 물건을 나르는 입이 넓은 바소쿠리. 허허허."

물건을 고르던 노인이 소쿠리 하나를 들고 쳐다보며 웃는다. 바소쿠리처럼 입 크게 벌려 한껏 웃는 모습의 사람들로 가득한 자인장을 상상해 본다.


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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