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모로코 사하라 사막(2)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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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01   |  발행일 2021-01-01 제36면   |  수정 2021-01-01
무위의 자유와 평화…살아남은 것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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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투어의 점심 캠프. 점심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라는 게 없었다. 보드를 타거나 산책을 하거나 ATV를 타는 등의 선택지가 있었다. 나는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음악도 들으며 무위의 자유를 누렸다.
저녁 식사는 더욱 화려했다. 빵과 샐러드를 기본으로 하여 서너 종류의 타진과 쿠스쿠스, 요거트, 디저트 과일까지 성찬을 내어놓았다. 코스요리처럼 풍성하다. 온종일 운전을 하고 다시 두 시간 넘게 낙타를 탔으니 배가 많이 고팠다. 그러나 식탁에 가득 놓인 음식만으로 이미 그득한 충만감이 들었다. 거기에다 우리를 배려하여 라면까지 끓여내었다. 사하라 한가운데서 라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이다. 마냥 장삿속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일종의 사람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차를 세 잔 권하는 습관이나 음식을 남길 만큼 풍성하게 차리는 중국의 손님 접대 풍습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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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가 끝난 후 베르베르 젊은이들이 텐트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우고 전통 타악기로 연주를 했다. 연주가 고조되자 처음 본 우리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즐기며 쉬고 있는데, 텐트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운다. 그리고 대 여섯 명의 베르베르 젊은이들이 북과 꽹과리 같은 전통 타악기를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의 농악 장단 같기도 하고 아프리카 밀림 속 원주민의 가락 같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 둘씩 그 주위를 둘러쌌다. 연주가 고조되면서 그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들 손을 끌고 함께 추자고 일으킨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빛나고 땅에는 모닥불이 타오른다. 그 빛과 빛 사이에 오늘 처음 본 우리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춘다. 그 장단에 우리 아리랑도 함께 부른다. 거기에 뒤질세라 유럽 젊은이들도 신나게 자기 나라 노래를 부른다. 졸지에 국제가요제가 되었다. 이 모두가 사하라가 부린 마법이었다.

그러던 중에 베르베르족의 한 젊은이가 슬며시 악기를 놓고 모래언덕을 올랐다. 그리고는 달을 우러러보며 연신 절을 올렸다. 달빛이 만든 어깨선 실루엣이 경건하게 일렁였다. 저 달의 방향이 메카인가 보다. 마라케시에서도 잊을 만하면 사방에서 기도소리가 울렸다. 하긴 신에 기대지 않고 이 시공간을 어떻게 건널 수 있었을까 싶다. 이 대륙에는 기도할 일이 많다. 이 거친 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가장 기도할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도 덕분인지 어쨌든 이곳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없는 편안한 표정들이다. 이곳 사람들은 말끝마다 '인샬라'를 외친다. '신의 뜻대로!'


자유 깨달은 야생 체험
배고프면 먹고 해가 지면 숙소로
물도 전기도 풍족하지 않았지만
일상의 일 생략하니 의외로 편해

하나가 된 캠프파이어
베르베르족의 흥겨운 전통 연주
아리랑으로 시작된 '국제가요제'
처음 본 모두가 손을 잡고 춤 춰

순탄치 않은 페스 가는 길
억울한 '과속 딱지' 벌금 2만원
다음 마을에선 "일단정지 위반"
어이없어 웃으니 "그냥 가세요"


한바탕 춤판이 끝나자 나라도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다른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하라 밤하늘 아래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친구가 되었다. 오늘 하루는 꽤 길었고, 사막에서의 첫날 밤은 평화롭고 편안했다.

모닝콜을 듣고서야 잠이 깼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사하라 속에 고립되어 본격적인 사하라 투어를 할 것이다. 낙타의 등은 하루가 지나도 쉽게 적응되지 않을 만큼 여전히 높았다. 사라져가는 존재의 마지막 실루엣 같은 황량한 사구 사이로 자꾸만 들어간다. 한 시간 반이 넘는 깊이만큼 들어왔나 보다. 원두막 같은 작은 캠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사막을 즐기고 점심을 먹는단다.

모래를 느끼고 싶어 맨발로 걸었다. 모래는 적당히 따뜻하게 내 몸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낮은 곳에서 사하라를 마주하였다. 멀고 높은 곳에서 죽은 듯이 보였던 이곳은 살아 있는 곳이었다. 바람과 모래, 햇살과 하늘이 엮어내는 생동적인 삶의 공간이었다. 바람과 모래와 햇빛은 벌레와 새와 풀을 키워냈다. 어디서 삶의 근원을 길어 올렸는지 뿌리를 내린 채 엎드려 있는 풀들, 무엇을 찾아다니는지 여린 발자국을 만들며 분주한 벌레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나 그 위를 맴도는 새들까지, 이곳은 살아있는 곳이었다. 바람은 모래 도화지를 빚었고, 햇빛은 그 위에 자신의 붉은 색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도화지를 따라가다 보면 온갖 흔적들을 만난다. 풍뎅이 같은 작은 벌레가 어지러운 곡선을 만들고, 굴뚝새보다 작은 새가 총총거리며 콕콕 찍어놓은 발자국도 앙증스럽다. 그러다 뒤돌아보면 바람이 어느새 그림들을 지워버리고, 새 도화지를 만들어 펼쳐놓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하라 역시 자세히 오래보아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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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의 ATV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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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를 함께했던 김정희 화가의 작품 '사하라의 여인'.
모래언덕에서 마주하는 나의 점심식사도 내가 이곳에서 살아있다는 확인의 의식 같았다. 음식이 차려지자 주변의 생명체들도 더욱 분주히 움직였다. 이런 촉이 이곳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본능일 것이다. 점심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라는 게 없었다. 보드를 타거나 산책을 하거나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ATV를 타는 등의 선택지가 있었다.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음악도 들었다. 지겨워진 누군가 베르베르 가이드에게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으니 해질 무렵이란다. 또 누군가 언제 저녁을 먹느냐고 물으니 배고플 때 먹는단다. 참으로 사하라에 어울리는 답변이다. 그동안 나는 실컷 무위의 자유를 누렸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해그림자가 길어지자 다시 낙타에 올랐다. 해질 무렵 배고플 때였다. 둘째 날 캠프는 내가 각오한 그대로였다. 첫날 밤의 호사스러움을 기억하는 몸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수도꼭지가 달린 작은 통이 오늘 우리가 함께 사용해야 할 공용수란다. 물론 화장실도 공용이고, 태양열 전기는 휴대폰 충전은커녕 겨우 희미한 전등만 살릴 정도였다. 이빨 닦고 대충 세수만 하고는 옷을 껴입었다. 제대로 야생의 사막 체험을 하는 것 같았다. 일상적으로 하는 것들을 생략하고 보니 의외로 편했다. 내일은 다시 500㎞ 정도 떨어진 페스까지 이동해야 한다. 이곳의 도로 사정으로 보아 빨라도 8시간 이상 걸릴 것이다. 새벽에 움직여야 했으므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우리 일행만 먼저 낙타에 몸을 실었다. 해가 뜨기 전 새벽 어스름이 드리운 사하라는 냉기가 감돌았다. 호스텔에 도착한 후 먼저 휴대폰부터 충전을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내비게이션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다시 짐을 꾸렸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호스텔을 나선 시간이 9시30분이었다.

흙먼지 날리는 사막을 통과하자 차츰 푸른빛이 감도는 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크지 않은 수많은 도시를 통과했다. 이곳에도 경찰들이 많았다. 한 도시를 벗어날 즈음 앞에서 경찰이 세우라고 손짓을 한다. 내려서 으쓱하는 제스처를 하니 속도계를 보란다. 속도계에는 75㎞가 찍혀있었다. 늘 속도에 신경 썼던 터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짧은 영어로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속도계만 가리킨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돈 2만원 정도의 벌금 고지서를 받았다. 그러더니 현찰로 지금 그 벌금을 달라고 한다. 모로코 경찰의 악명을 익히 들었던 터라 여러 가지로 의심이 갔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외국에서 속도위반을 한 것은 이탈리아 이후 처음이었다. 그나마 이탈리아 고지서는 귀국 몇 달 후 한국 집으로 우편연락이 온 것이었고,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계고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로코 도시마다 진출입로에는 어김없이 경찰이 서있었다. 마을이 보이면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며 서행을 했다. 그런데 다음 도시 진입로에서 또 경찰이 차를 세우란다. 이번에는 일단정지 위반이란다. 그러면서 임시 가설을 한 표지판을 가리켰다. 나는 또 당했구나 싶어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웃으니 그 경찰도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자기도 "한국을 좋아한다"며 조심해서 운전해 그냥 가란다. 한 시간 남짓 사이에 울고 웃는 두 번의 에피소드를 경험했다. 그래도 마지막이 웃는 쪽이어서 한결 마음이 풀렸다.

권응상 (대구대 교수)
400㎞쯤 달렸을까 생소한 풍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원처럼 우거진 숲에 그림 같은 유럽식 주택들이 즐비한 도시였다. 모로코의 스위스로 불리는 이프란(Ifrane)이었다. 이프란은 미들아틀라스 주에 있는 작은 도시로,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해발 고도 1천665m 지점에 위치하며 겨울철 스키리조트가 유명하다. 16세기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 지배 하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고산 기후로 인해 다른 모로코의 도시들과 달리 유럽식으로 조성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시에서는 그 흔한 묽은 흙벽돌의 모로코 가옥은 보이지 않았다. 유럽식 가옥과 깨끗한 도로,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유럽의 어느 도시 같았다. 잠시 유럽의 어느 도심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제 목적지 페스까지는 한 시간 남짓하면 도착할 것이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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