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여행] 청도 고평리 오부실 마을과 혼신지…시든 蓮 줄기…가슴시린 사연 간직한 못은 오늘도 말이 없다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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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15   |  발행일 2021-01-15 제13면   |  수정 2021-06-2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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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실 입구의 혼신지. 혼인을 앞두고 안타깝게 죽은 신랑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겨울철 일몰 촬영명소로 이름 나 있다.

고치미들을 가로질러 간다. 고치미는 무엇일까, 누에를 쳤었나, 고비나물을 길렀나, 정답 모를 질문만 되뇐다. 흐리고 부드러운 하늘 아래 겨울의 들은 싸늘하고 순결하다. 그것의 요체는 해를 거듭해온 사람들의 성스러운 끈기일 터. 들의 끝자락에 자연석 하나가 연마된 화강석 위에 올라 있다. 바위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오부실'이라 새겨져 있다. 오부실(五富室)은 청도 고평리(古坪里)의 자연마을로 '다섯 부자가 나온 터'라고 전해진다. 표석 뒤로 들은 넓고, 다섯 부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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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지 옆에 자리잡은 혼신지 마을. 왼쪽의 가로로 긴 집이 '혼신지의 집'이다.

◆오부실의 혼신지

동네 입구에 연못이 있다. 혼신지(魂神池), 가슴이 텅 빈 듯 서러운 이름이다. '오부실 못'이라고도 한다. 작지만 해끔하여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겠다. 옛날옛날 혼인을 앞둔 신랑이 등짐을 지고 신부 집으로 가던 중 이 연못을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못가의 좁은 오솔길을 아슬아슬 걷던 새신랑은 마침 불어온 거센 바람에 균형을 잃고 그만 물에 빠져 버렸다. 단단히 붙들어 맨 등짐 때문에 신랑은 안타깝게도 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혼인을 앞두고 애통한 일을 당한 신랑을 위해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의 혼을 불러 위로하는 굿을 했다. 못은 '혼을 불렀다'하여 '호신지(呼神池)'라 불리다가 이후 '혼을 건져냈다'는 뜻의 '혼신지'가 되었다고 한다. 창졸간 신랑을 잃은 신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섯 부자가 나와서 붙여진 이름
못에 빠진 예비신랑 사연 전해져
음표같은 蓮줄기, 일몰촬영 명소



연못 양쪽은 야트막한 야산이 감싸고 있다. 앞으로 펼쳐진 들판의 끄트머리에는 비슬산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하고 평탄한 연봉들이 가로누웠는데 그 가운데로 해가 떨어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혼신지의 마른 연잎 줄기들은 흡사 음표와 같은 추상적인 무늬를 만들며 인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그래서 혼신지는 겨울철 일몰 사진 촬영 명소로 소문이 나 있다. 벌써 15년 전쯤부터라 한다. 한때는 서울과 경기도에서도 관광버스를 대절해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도 한다. 연은 혼신지의 동쪽 가장자리에 퍼져 있다. 근래에 먼 데서 찾아왔다는 어떤 이는 생각보다 연이 많지 않다고 투덜투덜 거렸다. 지난해 가뭄이 심해 물이 줄어드는 바람에 연이 덜 자랐고, 올해는 또 긴 장마로 인해 연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해 지는 것을 바라보는 호숫가에 집들이 서 있다. 여유와 취향을 맘껏 드러낸 얼굴들이다. 그들 중 가장 왼편에 가로로 긴 집이 자리한다. '혼신지의 집'이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고,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김현진의 작품으로 그녀는 이 집으로 국토교통부가 주최하고 대한건축사협회가 주관하는 '2014 대한민국 신진건축사 대상'을 받았다. 당시 국제적인 사진가 헬렌 비네가 이 집에 머물며 공간의 여러 모습을 촬영해서 꽤나 큰 이슈로 들썩였었다. '욕실 거울에 혼신지가 비친다'는 기사를 읽고 꼭 한 번 봐야지 했던 기억이 있다.

집은 굳게 닫혀 있다. 연못에 면해 낮게 쌓인 돌담 앞을 서성인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이 틈 없이 촘촘하다. 인근의 석산(石山)에서 푸른빛 나는 돌들을 잔뜩 주워와 한 달에 걸쳐 하루에 2m씩 쌓았다고 한다. 옆의 집들도 모두 같은 높이의 담장이다. 검푸른 창문들은 정적 속에서 비장하게 경치를 주시하며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혼신지 너머 서쪽하늘에는 아직 유리같이 차가운 낮의 빛이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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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마을. 1층은 갤러리 등으로 오픈돼 있다.

◆마을 속의 마을

혼신지 가에 무리를 이룬 집들을 사람들은 '혼신지 마을'이라고 부른단다. 골짜기 안쪽으로 몇 미터 들어가면 눈에 확 들어오는 노란 컨테이너 건물과 함께 '발도르프 마을'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또 다른 마을 속의 마을이다. 마을 안길 양쪽으로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단순한 매스들의 중첩 위에 평지붕, 박공지붕, 외쪽지붕들이 스카이라인을 재미있게 절단하고 있다.

이곳은 2014년 경 발도르프 교육자 7명이 모여서 만든 마을이라 한다. 부지를 공동으로 매입해 건축했는데 설계 시 1층은 아트공간으로, 2층은 주거용으로 협의되었다고 한다. 아트공간은 갤러리, 공방, 체험장 등으로 쓰이고 있고 노란 컨테이너 건물은 '마을 속 갤러리 노란집'으로 카페다.


건축사 大賞 받은 '혼신지의 집'
교육자들의 공동체와 문화마을
각양각색의 전원주택 자리잡아



발도르프 교육은 1919년 루돌프 슈타이너에 의해 세워진 학교에서 출발한 대안교육이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발도르프 아스토리아'라는 담배공장이 있었는데, 공장 주인이 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슈타이너에게 부탁함으로써 발도르프학교가 생겨났다. 이 학교를 위한 교과과정이 후대까지 영향을 미쳐 교육운동으로 발전했고 현재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오부실의 발도르프 마을에 교육기관은 없다. 단지 지향점이 같은 사람들의 평면적인 공동체로 느껴진다. 지금 마을 카페와 갤러리 등은 잠시 문을 닫은 상태다. 인적 없는 마을에 온갖 음조와 음색의 개 짖는 소리가 짜랑짜랑하다.

마을 안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문화마을' 표석과 함께 탁 트인 골짜기가 열린다. 각양각색의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이다. 1999년 조성이 시작된 고평리 문화마을은 입지조건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원주택이 하나둘씩 들어섰다고 한다. 언뜻 빈 집도 보이고 정해진 용도가 있을 법하나 방치된 듯한 나대지도 보이지만, 또한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이가 보이고 무엇을 하는지 공터에서 서성이는 청년도 보인다. 이곳에는 도예가도 살고, 대구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산다고 한다. '퇴직 후 전원주택'이라는 인식은 옛일이 된 듯하다. 마을 깊은 곳에는 낮은 구릉들이 이어지는데 대부분이 과수원이다. 복숭아밭이 많다고 한다. 복사꽃 필 무렵 이 마을은 얼마나 아름다워질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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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교에서 바라본 청도천. 천변에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조성돼 있으며 봄날 벚꽃길로 유명하다.

낮은 구릉들 사이로 점차 오르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고 가파르게 한 번 고개를 넘듯 한다. 그러면 불쑥 좁은 골목길이 이리저리 얽힌 마을이 나타난다. 고평리 마을회관이 있는 곰정골이다. 고평리는 19세기 지리지에 처음 이름이 등장하지만 고분군이 존재하고 조선 선조 때 향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래전부터 논농사를 지어 고래뜰이라 한 것이 한자로 음차해 고평동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곰정골에 대한 유래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마을회관 옆 둥치 굵은 정자나무가 마을의 긴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마을 앞에는 청도천이 흐른다. 고평교에서 바라보는 청도천은 제법 넓고 하중도가 스산히 아름답다. 천변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조성돼 있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시절의 쌀쌀함에 줄느런히 선 가로수들의 반영도 얼어붙은 듯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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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실 마을 표석.

여행Tip

대구 파동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가창을 지나 청도 방향으로 간다. 팔조령 터널을 지나 직진하다 샛별교차로에서 청도IC방향으로 좌회전해 연지로를 따라간다. 유등리의 유등지(유호연지)를 지나 약 950m 정도 가면 왼편 논밭 사이로 난 길 입구에 '소라, 고평리' 이정표가 있다. 길 따라 직진하면 논 끝에 '오부실' 마을 표석이 있고 몇 미터 앞에 '혼신지'가 펼쳐진다. 연못을 지나 골짜기로 조금만 들어가면 '발도르프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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