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방치되고 있는 영주 소헌왕후 태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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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21   |  발행일 2021-01-22 제20면   |  수정 2021-01-22
김희태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소백산이 있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에는 소헌왕후의 태실이 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소헌왕후 심씨(1395~1446)는 세종의 왕비이며 태실(胎室)은 태를 봉안한 장소라는 의미다.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신중히 처리했는데, 이는 태주의 생애와 더불어 나라의 국운과 연관을 지어 해석했다. 때문에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왕의 자녀가 태어나거나 왕의 태실을 가봉할 때 길지와 길일을 올렸다.


태실은 그 형태에 따라 아기씨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하는데, 외형상 봉분과 태실비만 부각된 아기씨 태실비와 달리 가봉 태실은 난간석과 가봉비 등의 석물을 추가로 가설했다. 소헌왕후의 태실은 조선 최초의 왕비 태실이면서 동시에 가봉 태실로 조성되었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왕비의 태실은 영주 소헌왕후 태실, 홍천 정희왕후 태실, 예천 폐비 윤씨 태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봉 태실의 흔적이 확인된 사례는 경북에 있는 영주 소헌왕후 태실과 예천 폐비 윤씨 태실 밖에 없다.


소헌왕후 태실은 초암사(草庵寺)에서 국망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상에 있는 태봉의 정상에 있다. 소백산에 조성된 것은 여러 기록의 교차 분석을 통해 확인이 된다. 우선 '세종실록'에는 양주 동면 여염 사이에 있었으나, 왕비가 된 이후 경상도 순흥부 중륜사(中輪寺) 골짜기로 태실을 옮겨 묻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풍기현 편에는 소헌왕후의 태실이 소백산 윤암봉(輪庵峯)에 있다고 했으며, '세조실록'에는 소헌왕후 태실의 석난간(石欄干)과 전석을 보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 석난간과 전석은 가봉 태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에 위의 기록과 현장을 종합해보면 최초 양주 동면 여염 사이에 있던 소헌왕후의 태실은 왕비가 된 뒤 소백산 중륜사 골짜기, 윤암봉으로 옮겨졌고, 이때 가봉 태실로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소헌왕후의 태실지는 현재 분묘가 들어서 외형만 봤을 때는 이곳이 태실지인지 알기조차 쉽지 않다. 다만 주변에 흩어져 있는 태실 석물을 통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분묘에 있는 상석을 보면 기묘구월(己卯九月)이 새겨져 있어, 1939년에 현재의 묘가 조성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이 망한 뒤 태실 관리의 부재 속에 소헌왕후 태실 역시 훼손을 피하지 못했고, 분묘가 조성될 때 석물을 재활용한 흔적도 남아 있다. 또한 태실지 주변으로 우전석과 횡죽석(橫竹石) 등의 석물이 다수 확인이 되고 있는데, 해당 석물의 경우 '세조실록'에 기록된 석난간을 이루는 석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와 함께 태항아리의 파편이 확인되는 등 문헌 기록과 현장에 남겨진 석물 등을 통해 해당 장소가 소헌왕후의 태실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조선 최초의 왕비 태실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소헌왕후 태실은 현재 훼손되고, 방치된 채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소헌왕후 태실에 관한 정보는 일부 논문에서나 찾을 수 있을 뿐, 대중들이 접하기는 상당히 어렵기에 이와 관련한 보존과 활용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태실 관련 석물이 제법 잘 남아 있어 태실지 주변의 정비 및 이정표와 안내문 등의 설치 등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소백산의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소헌왕후 태실에 대한 관심과 보전이 필요하다.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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