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 "제주도에 여인 김만덕이 있었다면 대구에는 여인 이득심이 있었다"

  • 송은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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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1   |  발행일 2021-02-03 제12면   |  수정 2021-02-01
1923년 대구 중동 주민들이 세운 상궁 이득심 송덕비
수성구 중동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작은 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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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중동행정복지센터 앞 1923년(왼쪽), 1980년(오른쪽) 조성된 이득심 송덕비.
돌두꺼비
윤용진 경북대 교수가 1966년 촬영한 사진. 비목, 송덕비, 돌두꺼비가 보인다.수성구청 제공


"제주도에 여인 김만덕이 있었다면 대구에는 여인 이득심이 있었다."

대구 수성구 중동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작은 비 2기가 있다. 구한말 고종 때 상궁을 지낸 이득심(李得心)의 선행을 기리는 송덕비다. 1923년 처음 세운 비 글자가 닳아 보이지 않자 1980년에 같은 비문을 새긴 비를 하나 더 세운 것이다.
이득심은 헌종, 철종 시대인 1850년 전후 대구 중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풍현감을 지낸 이재연이다. 어린 나이에 궁궐로 들어가 궁녀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내명부 정5품 상궁에까지 올랐다. 상궁은 왕의 후궁인 내관을 제외한 궁관(궁녀)으로선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지위다.

조선 말기 고종 때 국운이 쇠퇴하고 조정의 조직과 기능이 축소되자, 그녀는 상궁을 사직하고 고향인 대구 중동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녀의 눈에 비친 중동 주민들의 모습은 비참했다. 흉년과 조세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재를 털어 주민의 조세를 덜어주고,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주민들을 구휼했다. 중동 주민들이 이러한 그녀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세운 비가 이득심 송덕비다.

최초 비 위치는 지금 수성구 중동네거리 우리은행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윤용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1966년 촬영한 사진에는 비목(碑木)이라 불렸던 나무 아래에 속칭 돌두꺼비와 함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후 비는 중동 경로당(옛 중동동사무소) 앞 길가로 옮겼다가, 2016년 11월 현재 자리로 옮기고 안내판도 설치했다.
비는 앞면 중앙에 세로로 '전정경부인이득심지송덕비(前貞敬夫人李得心之頌德碑)', 그 좌우로 그녀의 덕을 칭송하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규방 범절 익혀 궁중에 살았고, 사직 위해 지극정성 제사를 이었도다. 가산 털어 이웃과 종족 돕고, 사재 출연해 의를 높인 덕을 돌에 새겨 기리노라' 비 측면에는 계해(1923) 1월 중동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그녀는 상궁으로 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잃어버린 시조 묘를 비롯한 선조 묘와 서울 강남 일대 약 6만평에 이르는 옛 문중 토지를 되찾은 일이 있었다. 2017년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에서는 이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충남 천안 시조 묘 인근에 그녀의 추모제단을 설치했다. 하지만 이 같은 큰 족적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그녀의 대구 중동에서의 삶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후손 이영하씨(전 대구향교재단이사장)는 "더 늦기 전에 할머니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할머니 직계후손인 중동 문중이 대부분 대구를 떠난 상황이라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글·사진=송은석 시민기자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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