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0] '해서제일' 구양순…세로로 길고 굳센 해서 후대에 모범, 고구려는 특사 파견해 배워오기도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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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4 07:45  |  수정 2021-02-04 07:50  |  발행일 2021-02-04 제17면
'붓 부서질 만큼 굳게 잡아' 기록
75세 때 쓴 '구성궁예천명'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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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순 作 '구성궁예천명'의 일부.

구양순(歐陽詢·557~641)은 중국 서예 역사에서 '해서제일'로 통한다. 우세남(558~638), 저수량(596~658)과 함께 당나라 초기의 3대 서예가로 꼽힌다. 그리고 안진경, 유공권, 조맹부와 더불어 '해서 4대가'라는 평가도 받는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견디며 자랐지만 유난히 총명해 경서를 많이 읽었다. 수나라 때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내면서 이연(당나라 고조)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 후 당나라의 3대 황제(고조·태종·고종) 아래서도 벼슬을 했다.

서예를 정말 좋아했던 그는 어느 날 말을 타고 외출했다가 우연히 서진(西晋) 시대의 서예가 삭정(索靖·239~303)이 글씨를 쓴 비석을 보게 되었다. 말 위에서 비석을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별로 주목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수백 보 가다가 삭정의 글씨에는 분명 그만의 특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돌려 되돌아갔다. 말에서 내려 반복해서 수 차례 살펴보면서 절묘함을 발견, 결국 비석 옆에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필획을 사흘 동안 보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재능도 뛰어났지만, 이런 각고의 노력과 연구 끝에 모두가 칭송하는 서예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다.

구양순은 왕희지의 서체를 모방하며 시작했으나 후에 독자적인 서체를 완성해 일가를 이루었다. 해서·예서·행서·초서 등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그중 해서가 으뜸이었다. 그의 해서 글씨는 세로로 길고 구조가 독특하다. 그리고 필력에 힘이 느껴지고 굳세며, 엄정한 규범을 따르고 있어 후대 서예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해서 작품으로는 산시(陝西)성 고궁 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 특히 유명하다. 당나라 위징이 글을 짓고, 구양순이 75세 때 해서로 쓴 것을 새겼다. 632년 여름의 일이다. 당나라 태종(이세민)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해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한 뒤 그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해 건립하게 한 비석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의 극치로 칭송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글씨에 대해 '구양순의 만년 필력은 더욱 강하고 굳세며, 집필할 때 붓이 부서질 정도로 굳게 잡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풀 속에서 뱀이 놀라고, 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금강신이 눈을 부릅뜨고, 장군이 칼을 휘두르는 것 같다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구양순은 서예이론에서도 높은 성취를 보였다. '전수결(傳授訣)' '용필론(用筆論)' '팔결(八訣)' '삼십육법(三十六法)' 등 서예 이론서를 저술했다.

구양순 작품은 국외 서예 애호가들로부터도 사랑받았는데, 고구려 시대에는 특별히 장안으로 특사를 파견해 구양순의 서예를 배워오게 할 정도였다. 당나라 고조는 이런 소식을 듣고 "구양순의 명성이 멀리 오랑캐들까지 알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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