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여행] 충북 영동 월류봉…청학 깃드는 다섯 봉우리, 달님도 반해 쉬어가네

한천팔경 제1경인 월류봉. '봉우리에 달이 머물고 능선을 따라 물 흐르듯 기운다'고 해서 월류봉이라고 한다. 월류봉 아래로 초강천이 휘돌아 흐르고, 벼랑 위에는 월류정이 고즈넉하게 자리한다.

그것은 월류교를 건널 때 슬쩍 보였다. 사실 슬쩍 보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소심하게 곁눈질을 했다는 것이 정직하다. 어떤 장대한 기골이 곁으로 바싹 다가오면 저절로 흡 하고 숨을 삼키고 공벌레처럼 오그라들어선 겨우 흘끔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제 멀어져 갔다는 이상한 실망의 안도가 흩어지기도 전에 그것은 원촌교 앞에 다시 나타났고 육중한 속도로 일어나 앞을 막아섰다. 단단한 등줄기를 치켜세운 엄청난 침묵이었다. 그러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먼저 악수를 청해야 한다는 공연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쩐지 이제 막 세계의 발치께에 도달했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초강천 벼랑위 살포시 앉은 월류정
밤마다 까치발로 달 기다리는 듯
산양벽·청학굴·용연대·냉천정…
인근 한천팔경 빼어난 경치 자랑
조선 시인묵객 아름다움 시로 남겨
송시열 은거하던 한천정사도 남아

◆월류봉

하나, 둘, 셋, 넷, 다섯 봉우리가 연이어 솟았다. 언뜻 여섯 또는 일곱으로도 보인다. 저 봉우리에 달이 머물고 이윽고 능선을 따라 물 흐르듯 기운단다. 그래서 월류봉(月留峯)이다.

월류봉은 백두대간 삼도봉 서편 민주지산에서 북상한 산맥이 황간면 원촌리(院村里)로 내달리다 하늘로 치솟은 봉우리다. 제1봉은 365m, 제2봉은 381m, 제3봉은 394m, 제4봉은 400m, 상봉이라 불리는 제5봉은 405m다. 연봉 아래로는 민주지산 물한계곡에서 시작된 초강천(草江川)이 휘감아 흐른다. 월류봉이 초강천으로 급하게 내리꽂힌 벼랑 위에는 월류정이 자리한다. 처마 아래 초조함을 숨기고 까치발로 서서 매일 밤 달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예로부터 월류봉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뛰어난 경치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하였는데, 산양벽(山羊壁), 청학굴(靑鶴窟), 용연대(龍淵臺), 냉천정(冷泉亭), 법존암(法尊菴), 사군봉(使君峯), 화헌악(花軒嶽)이 그것이다.

산양벽은 병풍같이 깎아지른 월류봉의 첫 번째, 두 번째 봉을 말한다.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 산양만이 오를 만한 절벽이다. 바위에 붙어 기어자라는 구실사리, 열악하나 햇빛이 잘 드는 자리를 좋아하는 톳이끼, 햇빛과 이슬을 먹고 자라는 사철 푸른 바위손 등이 얼룩처럼 터를 잡고, 용감한 수목들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는 단애다.

청학굴은 제1봉의 중턱에 있다는 자연 동굴이다. 가을이면 단풍이 붉게 물들고 청학(靑鶴)이 깃든다고 한다. 용연대는 월류정 맞은편에 선바위처럼 솟아나 있는 바위를 가리키는데 바위 아래의 소(沼)를 용연이라 부른다. 냉천정은 찬물이 가득한 곳이다. 월류정이 자리한 벼랑 오른쪽 모래밭에서 샘 줄기가 여덟 팔(八)자로 급하게 쏟아붓듯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법존암은 냉천정 근처에 있었다는 작은 암자로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사군봉은 황간면 뒤편 북쪽에 있는 명산으로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연마하면 나라의 사신(使臣)이 된다는 곳이다. 화헌악은 한천정 뒤쪽의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만산홍(滿山紅)을 이루어 화헌이라 하였다.

신광한(申光漢), 황준량(黃俊良), 구봉령(具鳳齡), 홍여하(洪汝河), 장복추(張福樞) 등 조선시대 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을 찾아와 그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해 저문 빈 강에 저녁 안개 자욱하고/ 찬 달이 고요히 떠올라 더욱 어여뻐라/ 동쪽 봉우리는 삼천 길 옥처럼 서서/ 맑은 달빛 잡아놓아 밤마다 밝네.'

홍여하가 노래한 월류봉이다. 월류봉을 바라보는 광장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몇 번이고 오가며 바라본다. 달은 멀리에 있으나 바로 저기에 있는 듯 그려진다. 아름다운 것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긍지는 바라보는 이에게 이식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향하고 싶은 영혼의 형상을 그리게 되는 듯하다.

용연대 근처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천을 건너 모래밭에 내려서면 냉천정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월류정에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도로변 출입문이 잠겨 있다. 시퍼런 초강천 변에서 한 걸음도 더 다가가지 못하지만 서운하지 않다.

한천정사는 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곳으로 충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다.

◆한천정사와 송시열

월류봉 동쪽 천변의 둔덕진 자리에 흙돌담을 두른 세 칸 기와집이 있다. 대청에 한천정사(寒泉精舍) 편액이, 기둥에는 한천팔경의 각 이름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옛날 고려 때 이 마을에는 심묘사(深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심묘사 팔경'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현재의 한천팔경이다. 심묘사가 정확히 어느 곳에 위치했는가는 분명치 않으나 지금의 한천정사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한천정사 입구 계단 아래쪽에 감나무가 장하다. 무성하게 빈 가지에 월류봉 자락과 월류정이 걸려 있고, 또 무성하게 빈 가지 사이로 초강천이 흐른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월류봉 다섯 봉우리가 제자리걸음으로 점차 멀어진다.

한천정사 앞 감나무가 실루엣처럼 서있다. 한천정사는 한천팔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위치한다.

한천정사는 한천팔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머물렀다 한다. 우암은 병자호란 때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해 초야에 묻혀 살았다.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했고 우암은 다시 중앙으로 나아갔지만 그는 정치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여러 번 낙향을 했다. 그가 이곳으로 내려온 것은 그의 나이 43세 때다. 효종의 북벌계획 추진 과정에서 조정의 갈등이 악화되면서다. 그는 월류봉 아래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여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후학들은 한천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서원은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현재의 한천정사는 유림회(儒林會)에서 다시 지은 것이다.

등산로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다 한 굽이를 돌면 초강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