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구한말 영남 큰선비, 독립운동가 회당 장석영 주손, 장세민씨의 평범한 삶과 특별한 삶

  • 송은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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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7   |  발행일 2021-02-10 제11면   |  수정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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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민씨 부부와 장남, 재종형이 장씨의 양어머니 기제사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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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민씨


"저는 아버지가 두 분, 어머니가 두 분입니다. 오늘은 저의 양어머니 기제사입니다."

지난 4일 밤 구한말 영남 큰선비이자 독립운동가인 회당 장석영 선생 4대 주손 장세민(54·대구시 북구 고성동)씨를 만났다. 장석영(1851~1926) 선생은 경북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출신으로 한주 이진상 선생 제자 중 여덟 수재를 일컫는 '주문팔현'에 든 유학자다. 또한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 초안(회당본)을 작성한 독립운동가로 대통령 표창(1977) 및 건국훈장 국민장(1980)이 추서된 인물이다.

선생은 '사례절요', '대례관견', '구례홀기' 등 예서와 일제에 의해 대구교도소에서 치른 옥고 기록을 담은 '흑산록', 만주지역 독립기지건설과 이주 교포 생활상을 기록한 '요좌기행문' 등 유학자로서는 물론 독립운동가로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장세민씨는 5세 때 큰집 양자가 됐다. 당시 생가·양가를 통틀어 아들이라곤 장씨 혼자였다. 생모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장씨는 큰집 양자가 돼 고조부인 회당 선생 제사를 받드는 주손(맏손자)이 된 것이다. 철도청을 거쳐 현재 대구도시철도공사에서 근무 중인 그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결혼 직후 생부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장씨의 주손으로서 삶이 시작됐다. 먼저 아버지를 대신해 제사를 받들어야 했다. 4대봉제사·명절차례에 생모 제사까지 합치면 1년에 제사만 10여 회가 넘었다. 또 각산리에 있는 고조부 정자인 만서정과 고조부 유물도 관리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 문중은 물론 타 문중 출입도 해야 했다.

대도시 대구에 사는 평범한 30대 직장인으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예법에 밝았던 재종형 장세곤(63·구시 남구 대명동)씨였다. 장씨는 재종형과 모 예절교육기관으로부터 문중 예법과 고조부 현창사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장씨는 40대 젊은 나이에 부모님 세대에서 하지 못한 여러 일을 해냈다. 고조부 유물을 3차에 걸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고서, 고문서, 목판, 서화류 등 모두 2천500점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리고 문중, 학계, 지자체, 유림 등의 도움을 받아 여러 차례 회당 선생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선생의 저서 '흑산록'과 '대례관견' 등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또 2019년에는 칠곡군 애국동산에 회당 선생 '파리장서기적비'를 세우기도 했다.

슬하에 1남 3녀를 둔 장씨는 몇 해 전 생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는 중풍을 앓고 있는 92세 생부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다. 지금 장씨가 간절히 바라고 추진 중인 일이 있다. 생부의 건강, 고조부 문집인 '회당집' 국역사업, 정자 만서정을 보수하고 문화재로 등재하는 것이다.

장씨는 "풍속은 변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옛 전통을 지키는 집도 몇 집 있어야하지 않을까요?"라며 "이해하고 잘 따라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고마울 뿐입니다"고 말했다.


글·사진=송은석 시민기자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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