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1] '초당 3대가' 저수량...왕희지의 서풍 터득한 이후 대성 화려한 가운데 용필에 힘찬 기세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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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11 07:44  |  수정 2021-02-11 07:52  |  발행일 2021-02-11 제22면
대표적 작품은 '안탑성교서'
호방하고 윤택한 필획 호평

저수량-안탑성교서1
저수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안탑성교서비' 탁본(부분).

저수량(596~658)은 구양순, 우세남과 더불어 '초당 3대가'로 불리는 서예가다.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첸탕(錢塘) 출생. 박학다식하여 문학과 역사에 정통했던 그는 당 태종(이세민) 때 개조참군(鎧曹參軍)을 지냈으며, 이세민의 신임을 받았다.

621년 고조 이연이 아들 이세민에게 대륙 중원(中原)의 문무 양 측면을 장악하라 명하였다. 이에 이세민은 18학사를 국사(國事)의 자문으로 임명했다. 저수량의 아버지 저량이 그 일원으로 포함되었다.

저수량은 18학사였던 구양순과 우세남의 지도 아래 서법을 익혔고 그 실력이 날로 출중해졌다. 그는 정치적인 지위와 사회적 명망을 함께 얻어 홍문관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했다.

629년에는 기거랑(起居郞)을 맡아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았다. 638년에 우세남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당 태종과 서법을 논하는 시서(侍書) 직위에 올랐다. 641년에는 기거랑을 그만두고 국사를 자문하는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맡았는데 태종은 큰일이 있을 때마다 저수량과 상의했다. 이후 거듭 승진하여 중서령(中書令)에까지 올랐다. 고종이 즉위하자 하남군공(河南郡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에 고종이 무측천을 황후로 봉하려는 것에 반대하다 좌천되었다.

저수량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해 마침내 대성하였다. 아름답고 화려한 가운데에도 용필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담았다.

대표작으로는 '안탑성교서비(雁塔聖敎序碑)' '맹법사비(孟法師碑)' '방현령비(房玄齡碑)'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 등이 있다.

그의 가장 대표적 작품은 '안탑성교서'다. 당 태종이 지은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와 고종이 지은 '대당삼장성교서'를 합친 것을 해서로 썼다.

이 글씨를 새긴 '안탑성교서비'는 653년 지금의 산시성 시안(西安)시 자은사(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 아래에 세운 비석이다.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보기 드물게 뛰어난 글씨라는 칭찬을 듣고 있는 이 비석의 글씨는 공간이 너그럽고 생동감이 있다. 필획은 수려하면서도 호방하고 윤택하다. 예서의 필의를 더해 형태가 성글면서도 기운이 유창하고, 획이나 삐침 모두 힘이 있어 마치 철사 줄로 엮어 만든 것 같다는 평을 듣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저수량은 좋은 붓과 먹이 없으면 글을 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과 구양순의 글을 비교하면 어느 편이 더 우세합니까"라고 물었다. 우세남의 대답이다. "구양순은 종이나 붓을 가리지 않으나(能書不擇筆) 자네는 아직도 종이나 붓에 구애를 받고 있으니 구양순이 낫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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