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여행] 양산 통도사 극락암…우수 지나니 '극락영지' 무지개다리 건너 꽃소식이 솔~솔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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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19   |  발행일 2021-02-19 제13면   |  수정 2021-06-27 14:04
선승 경봉스님이 주석한 암자
1332년 고려 충혜왕 2년 건립
'여여문' 들어서면 홍매 활짝
경내 연지는 통도팔경 중 하나
김정희·서병오 글씨도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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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극락암의 극락영지는 통도 팔경 중 하나다. 둥그런 연못가의 벚나무에 꽃망울이 돋았다. 강철마냥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무수한 잔가지에서 꿀꺽꿀꺽 수액 삼키는 소리가 난다. 연지 한가운데에 걸린 극락교는 경봉 스님이 1962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꽃

꽃이 피었다. 눈 녹아 비 된다는 우수(雨水)가 어제, 하마 입춘 즈음부터 남쪽의 꽃 소식이 거짓말마냥 솔솔 불어오더니 절기란 영락없다. 옛날 한 비구니 스님이 '봄을 찾으러 이 산 저 산 헤매어도/ 허탕 치고 집에 돌아와 후원 매화가지/ 휘어잡아 향기 맡으니/ 봄은 벌써 가지마다 무르익었다' 하였지. 누렇게 뜬 얼굴로 이제나저제나 종종거렸는데 아하 바로 저기에 꽃이 피어 있었네. 오늘이 '우수 뒤에 얼음 같다'할지라도 이제는 보인다, 앙상했던 가지들이 바알갛고 파아랗게 통통해지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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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요사채인 정수보각, 가운데는 수세전이다. 오른쪽은 극락암 현판이 걸려있는 무량수각이다.

◆통도사의 암자 극락암

지극한 기쁨, 극락(極樂). 괴로움이 없고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곳이다. 영축산이 병풍처럼 펼쳐 섰고 금강송 군락이 사방을 둘러싼 명당자리에 극락암이 자리한다. 양산 통도사의 산내 암자다.

극락암은 고려 충혜왕 2년인 1332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 선승인 경봉(鏡峰) 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하여 이름난 암자다. 앞마당의 둥그런 연지 가에 나무 꽃망울이 돋았다. 겨우내 선정에 들었던 초목들이 깨어나는 시간, 오래 살아온 듯한 벚나무는 강철마냥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무수한 잔가지에서 꿀꺽꿀꺽 수액 삼키는 소리가 난다. 극락영지라 불리는 이 연지는 통도 팔경 중 하나다. 봄이면 한 그루 벚나무가 극락영지를 장식하고, 여름이면 연꽃으로 장엄하고, 가을이면 단풍 물든 영축산이 잠기고, 겨울이면 맑은 하늘 구름이 노닐다 간단다.

연지 한가운데에 난간 없는 좁은 무지개다리가 높이 걸렸다. 탐진치(貪瞋癡), 즉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극락으로 가는 극락교다. 몇몇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다리를 건넌다. 성큼성큼 저 걸음이 놀랍다. 다리는 경봉 스님이 1962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경봉 스님은 189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1907년 출가해 통도사 성해(聖海)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통도사가 설립한 명신학교와 불교 전문 강원 등에서 불경연구에 몰두하였고 1914년에는 만해 한용운에게 화엄을 수학하였다고 한다. 강원을 졸업한 후 통도사에서 행정업무를 보던 그는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어치의 이익도 없다'는 경구를 보고 충격을 받아 통도사를 떠났다. 양산 내원사, 합천 해인사,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던 그는 다시 통도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극락암에서 3개월 동안 눕지 않고 좌선하며 정진하였다 한다.

극락교 위로 보이는 것은 영월루다. 왼쪽으로는 돌계단 위에 선 문 하나가 보인다. 여여문. 한자를 알아볼 수 없어 찾아보니 대부분이 '같을 여(如)'자를 써서 '如如門'이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같을 여'에 '나 여(予)'인 '如予門' 같다. 뭘 알 수 있겠나. 어쨌든 여여란 고요하고 평온한 세계, 여여란 변함이 없다는 것, 그래서 여여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세계로, 고요하고 평온한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는 뜻이라 한다. 여여. 극락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어딘가 고통스러운 이름이다. 문 안에 홍매가 피어있다. 화들짝 소란스러운 개화가 아니라 잊어버린 숨처럼 낮은 고동으로.

그리고 또 문 안에는 선원이었다가 요사채가 된 정수보각(正受寶閣)이 있고, 칠성각과 같은 수세전(壽世殿), 극락암 현판이 걸려 있는 무량수각(無量壽閣), 그리고 역대 조사의 영정을 모시고 현재 선원으로 쓰고 있는 조사각(祖師閣) 등이 자리한다. 무량수각의 오른쪽을 돌아 뒤로 올라가면 두 사람이 들어서기에도 작은 단하각(丹荷閣)에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다.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준다는 곳, 그래서 사람들이 밤을 새워 기도하는 곳이다. 건물 밖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바람막이가 되도록 달아 낸 가추가 단하각보다 더 크고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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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재와 삼소굴. 작은 건물이 삼소굴로 경봉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 50여 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원광재와 삼소굴

경내의 오른편에는 따로 두 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원광재(圓光齋)와 삼소굴(三笑窟)이다. 두 편액의 글씨는 대구의 팔능거사(八能居士)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가 썼다. 원광은 경봉 스님의 법호다. 원광재는 극락 선원장의 거처이며 경봉 스님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편액 좌우에 걸린 호쾌대활, 노송운영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 한다.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36세부터 약 50년간 생활한 공간이다. 처음에는 토굴이었다고 한다. 3개월간 눕지 않고 좌선하여 정진하던 그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1927년 11월20일 '촛불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는 별안간 문을 박차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의 깨달음을 담은 시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 빛이 온누리에 흐르누나.'

삼소굴 이름은 경봉 스님이 지었다. '삼소'는 '호계라는 시냇가에서 세 사람이 웃는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에서 따온 말이다. 중국 송나라 진성유(陳聖兪)가 지은 '여산기(廬山記)'에 이야기가 전한다.

동진(東晋)의 고승 혜원(慧遠)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며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라는 글귀를 걸어두고는 다시는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한다. 찾아온 손님을 배웅할 때도 사찰 아래 호계를 건너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자인 도연명(陶淵明)과 도사(道士)인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하다 이야기에 빠져 그만 호계를 지나고 만다. 문득 이 사실을 안 세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다. 이는 유교, 불교, 도교의 진리가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경봉 스님은 극락암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바세계를 무대로 한바탕 연극을 멋지게 해보라'는 말을 즐겨 하곤 했단다. 극락암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대문 밖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라'고 하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참 다정하다. 경봉 스님은 1982년 7월17일 입적하였다. 그는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말을 남겼다. 하나같이 알 듯 말 듯 알쏭달쏭한 말씀이시다. 다만 '넘어지지 말고 잘들 가라'라는 말이 몹시 시큰하다. 극락은 인간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난 곳에 있다고 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자꾸 걸어 나가면 결국 내가 선 자리가 극락인가. 봄 찾아 이산 저산 헤매어도, 온갖 것에서 나를 찾아도, 봄도 나도 눈앞에 있다지 않나.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가다 통도사IC로 나가 통도사로 간다. 통도사 주차장과 본 사찰을 지나쳐 계속 직진하다 수도암·안양암 방향으로 우회전한 후 계속 직진하면 된다. 중간중간 갈림길이 있으나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극락암에 있는 다양한 편액들을 놓치지 않기를 추천한다. 경봉, 추사, 석재, 회산 등의 글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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