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23년 만에 받은 선물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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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24   |  발행일 2021-02-24 제26면   |  수정 2021-02-24
직장 때문에 포항살이 23년
최근 지인이 선물한 책 한 권
'사진으로 보는 포항 도심…'
60~70년대 어릴 적 풍경서
비로소 정착하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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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나는 포항에 산다. 직장 때문에 낯선 도시에 와서 정착한 지가 올해로 23년째다. 이곳에 올 때 네 살이던 큰 아이는 어느덧 스물일곱 멋진 청년이 되었고, 포항에서 태어난 그 동생들까지도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포항은 이미 가장 긴 시간을 보낸 도시다.

최근 나는, 어쩌면 포항에 처음 왔던 23년 전에 받았어야 했을 만한, 귀한 선물을 하나 받았다. 지역사회를 섬기는 차원에서 지난 3년 한 고등학교의 운영에 참여해 왔는데, 연초 회의를 마치고 나서 다른 운영위원께서 책 한 권을 주셨다. 제목은 '사진으로 보는 포항 도심: 중앙동·두호동 이야기'이고, 포항지역학연구총서의 5권으로 도서출판 나루에서 작년 말에 출간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근대 도시 포항의 도심 지역에 관한 사진 모음이다. 앞부분에 약간의 배경 설명이 있고 사진마다 간략한 해설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글보다는 사진이, 아니 그 사진 속의 시가지 풍경들이 주인공으로 도드라지는 책이다. 그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배경 설명과 해설을 최소한으로 줄인 편집자의 깊은 마음 씀씀이가 곳곳에 배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골격이 만들어진 포항 구도심은 아마도 식민지학이나 사회사학, 도시계획이나 건축사 등의 분야에서 관심을 가질 법한 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1960~70년대에 이르는 시기 사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식민지 시기 주요 건물과 도시 시설들이 쇠락한 시대를 표상하듯 완고하게 서 있는 모습에 겹쳐서, 군사정권의 경제발전계획에 발맞추어 급히 조성될 수밖에 없던 산업단지 배후도시의 생동감 넘치는 무질서가 사진 하나하나마다 뿜어져 나온다.

이 책의 사진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지금 우리 가족이 사는 두호동의 아파트 단지가 오래전에 6년제 포항중학교의 터였음을 알게 되었고, 거의 매일 산책하는 영일대 해수욕장의 북쪽 해안이 예전부터 두무치와 설머리로 불리던 아름다운 포구였음과 롯데 백화점 앞뒤의 비슷하게 구부러진 두 도로가 포항 내항으로 이어지던 작은 개천과 그 옆의 단선 철길이 사라지며 남긴 자취임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낡은 주공아파트 단지를 재개발해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에 제법 커다란 흙산 셋이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을 때는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했다. 평소 그 아파트 단지 옆으로 오래된 제당 하나가 우스꽝스럽게 붙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해서 그 내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사진 속의 풍경들을 내게 익숙한 요사이 모습들과 맞추어 보다가 나는 이 책의 사진들이 그처럼 짙은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면서 도달한 것은 이 도심 풍경 사진들이 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 특히 그 시선들의 중첩이다. 우선 이 사진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을 찍은 사람들의 시선이다. 식민지 시기 주요 건물이 보이는 쇠락한 완고함과 산업단지 배후도시의 생동감 넘치는 무질서는 그들의 시선이 포착했던 그 시대의 주제인 셈이다. 하지만 내게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시선보다 그것에 겹쳐지는 다른 시선이다. 바로 60~70년대의 그 모습을 자신의 어린 시절에 실제로 보았고, 지금 이 사진들을 통해 50여 년 만에 다시 그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사진들 속의 어린 친구들, 그러니까 줄곧 포항에서 살다가 이제 60 전후에 이른 편집자의 시선이다.

바로 이 편집자의 시선 위에 시선을 스스로 중첩시키면서 나는 23년 만에 비로소 포항에 정착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래 기다리던 선물을 마련해 주신 이재원 선생께 깊이 감사드린다.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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