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합천 정양늪과 함벽루 연호사…눈부시게 잔잔한 수면위 내딛는 걸음마다 바뀌는 늪의 얼굴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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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05   |  발행일 2021-03-05 제36면   |  수정 20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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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폭의 풍경화를 그리는 정양늪의 오후.

그때 나는 이월의 경남 합천 정양늪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늪은 물에 젖은 땅, 말하자면 물도 아니고 흙도 아닌 땅이다. 늪은 흙물이 시나브로 흘러 흙과 모래가 쌓이고, 둑을 만들어 된 아름다운 습지다. 또 늪은 더러움을 없애는 정화의 힘이 있다. 늪은 스스로를 치유하고 인간마저 정화시키는 놀라운 자연생태의 보고다. 그럼에도 늪은 잉크 색으로 거울처럼 맑고 고요했다. 하늘의 구름이 내려와 쉬고, 바람마저 미끄러지는 수면은 깊은 명상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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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늪 생태학습관.

정양늪은 1만년 전 후빙기 이후 바닷물이 높아지고 낙동강 물줄기의 퇴적으로 태어나 뭇생명을 품고 길렀다. 황강의 가지인 아천천의 배후습지이며, 자연경관이 매우 빼어나고 여러 종의 동식물이 살아가는, 우리가 가꾸고 지켜야 할 소중한 습지다. 그리고 지금은 해시계의 시침처럼 수많은 겨울철새 큰고니, 큰기러기, 흰뺨 검둥오리, 청둥오리들이 햇빛 따라 애면글면 움직이고 있다. 햇빛이 잔잔한 수면에 반사돼 눈이 부시면서도 파란 늪의 물은 어디선가 꼭 본 듯한 환상을 불러왔다.

영화 '부활'에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예수의 눈이 저렇게 파랗고 깊었다. 저 늪은 하늘의 눈(目)인지 모른다. 인간이 버린 더러운 물이 늪에 와서 맑아지고 씻어지듯이.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예수의 눈 속에서 맑아지고 씻어지는, 그런 영성(靈性)의 눈(目)이 늪인지 모른다. 그렇게 정양늪은 땅과 하늘, 인간을 고리로 해 정화하는 자연의 눈물이기도 할 것이다. 수면 위에 설치한 데크길을 들머리로 걷는다.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늪의 속살은 단지 하얀 평화가 아니다. 거기는 기하학 같은 먹이사슬의 미로가 있다. 우거진 줄과 갈대, 늪에 살고 있는 토종붕어와 가물치, 천연기념물인 붉은배매새와 말똥가리, 야생생물 1급인 수달,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삵, 큰고니, 큰말똥가리, 금개구리, 황조롱이 서식지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정말 높은 장소다.


합천 정양늪
인간마저 정화시키는 생태의 보고
수면 데크길 걸으며 내려다보면
먹이사슬 미로로 얽힌 늪의 속살
장군주먹과 발자국 바위 전설 닿아
낭만적 황톳길까지 이어진 둘레길



레포츠 공원과 갈림길이 나오고, 그 길로 가도 서로 만나 하나의 길이 된다. 걷는 거리가 변할때마다 늪의 얼굴도 바뀌고 더욱 다양하다. 돌로 다듬은 징검다리를 건넌다. 마름, 노랑어리 연, 검정말도 보이는 것 같다. 늪이 내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갑자기 늪의 의식이 된다.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하늘도 바람도 되새떼도 조개구름도 얼마나 많은 처음의 언어와 자연이 수면에 담기는지. 아 아 정양늪은 흰 낮달, 전설, 그리고 인간의 피로한 이야기로 잔물결을 일으키기도 한다. 야자 매트 길을 걷는다. 길은 어디에도 있고, 시간의 대부분은 길로 메워지기도 한다.

'장군 주먹과 발자국 바위 전설'에 닿는다. 안내판을 간추리면 "신라와 백제 군사가 정양늪을 마주보고, 즉 대양면 하회마을 뒤 산성(신라)과 고소산성(백제)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신라 장수가 진지를 둘러보기 위해 용주면 성차골 먼당(산먼당 준말, 산마루 경남 방언)에서 출발해 용주면 안버러실 먼당에 첫발을 디딘 후 하회마을 참 먼당의 바위에 오른발을 디디며 생긴 발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를 장군 발자국 바위라고 한다. 이때 몸이 미끄러지면서 정양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손을 뻗어 주먹으로 바위를 짚으면서 위기를 모면했고, 그때 주먹으로 짚은 자국이 이곳에 남아 있다 하여 장군 주먹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참 아슴아슴한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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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과 절경의 함벽루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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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와 이어지는 연호사 경관.

다시 징검다리를 건넌다. 여기부터 토사길이다. 어디에서 철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너무 아름답다. 미국 보이저 우주선이 목성을 지날 때 우주의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 그 음악을 들은 미국 우주항공국 종사자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러다고 한다. 그 철새 울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부르르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정양리 하회마을 입구까지 가로수가 낭만적인 황톳길을 걷는다. 늪은 물의 지느러미를 파닥이면서 번득이고, 물비늘 부딪치는 소리가 나의 마음에 긴 맥놀이를 남긴다. 신(神)의 사랑이 들어 있는 늪의 물이 곧 말(言語)이다. 늪에 말을 던진다. 늪은 알아듣고 아름다운 물결무늬로 암각화를 그리며 퍼져 나간다. 모두 3.2㎞인 둘레길을 걷고 공원주차장에 닿는다. 그맘때쯤 오늘 안내 설명을 해주신 정양늪 생태공원의 공무직 김한성씨, 합천군청 관광진흥과 강봉자 계장님, 김수진님에게 감사드리며 석별의 정을 나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여기서 마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1㎞ 더 걸어 황강 가 절경인 함벽루 연호사에 도착한다.

저 황강은 언제부터 흘렀을까. 강은 때론 홍수에 범람하고 물길을 돌리면서 유역에 풍부한 자양분의 토사를 뱉어 놓는다. 그 비옥한 토양에서 농경을 터득한 인류는 곰비임비 문화와 역사를 만들고 이어갔다.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강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데크길에서 함벽루에 오른다. 기암절벽 공간에 자리한 함벽루, 바로 앞에 황강이 흐르고 강 건너 모래밭과 더 멀리 수려한 산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그 멋진 풍경에 감탄한다.


함벽루와 연호사
기암절벽 공간에 자리잡은 함벽루
황강·수려한 산 배경 한폭의 그림
시인·묵객 찾아와 人文 즐기던 곳
연호사 몽환적 뷰 포인트에 감탄
세상 온갖 번뇌 망상 떨치고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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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 뒤 석벽에 새겨진 우암 송시열의 글씨.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1321년) 함주 주지사 김영돈이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함벽루를 만들 당시 황강에 큰 나무가 많이 떠내려와 사람들이 나무를 건져내 정자를 세웠다 한다. 특히 함벽루에서 정양호를 바라보는 풍경이 압권이어서 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찾아와 시흥(詩興)으로 인문(人文)을 즐겼던 장소다. 이들 중 이황·조식·송시열 같은 조선시대 명유(名儒)들의 글이 누각 현판에 걸려 있다. 또한 누각 뒤편 암벽에 함벽루라고 새긴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들보 5량으로 된 목조 기와집이며, 특히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도록 배치된 점이 유명하다. 함벽루는 그 이름과 같이 하늘의 푸름, 강의 푸름, 나무의 푸름이 어우러져 인간의 감정을 적시는 절세의 경승지다.

그중 합천 출신이고 당대에 문명을 떨친 조식 선생의 초서체 현판을 번역해 본다. '喪非南郭子(상비남곽자: 남곽자처럼 무아경에 이르지 못해도)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가 없네)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뜬구름의 일을 익히려고 하나)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굽 높은 바람이 오히려 흩어 버리네)'. 남명 조식 선생의 높은 시(詩) 경지를 어떻게 짐작이나 하겠는가만 그냥 탄식하며 읊조려 본다. 바로 곁의 연호사는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몽환의 뷰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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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먼 산의 경치가 어른거리고, 더 넓어진 황강이 세월을 잊고 유유히 흐른다. 강물에 그 비경을 담그고, 세상사 온갖 번뇌 망상을 떨쳐버리니, 연호사는 부처님의 대장경으로 활짝 피어 있다. 황우산 황소가 황강에 물을 마시고 있는, 즉 황우음수 혈인 소머리에 법당이 있다. 극락전에 들어가 예불을 한다. 극락(極樂)은 활활 타는 마음의 불이 끄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인간 마음에는 항상 애증(愛憎)이라는 욕망의 불이 끊임없이 타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불교는 자심반조(自心返照)다. 언제나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깨달음으로 마음의 불을 끄는 것이다. 연호사의 창건을 짚어본다. 삼국시대 합천 대야성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 선덕왕 11년(642년) 백제 의자왕의 명을 받은 윤충 장군이 일만 병사로 대야성을 급습 함락했다. 이때 신라 장병 2천명과 김춘추의 사위 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랑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이듬해인 643년 대야성 전투 희생자들 넋을 기리기 위해 와우 선사가 연호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삼성각을 살펴보니 한줌 강바람에 풍경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그 애잔한 소리와 이악스런 풍경으로 등골에 성에가 핀다.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 나오면서 하루 행적에 무한 감동을 느낀다. 트레킹은 감사함을 배우는 것이다. 하늘에 행복을 내려달라 했더니 먼저 감사함을 배우라 했다.

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 여행사진 작가

☞문의: 경남 합천군청 환경위생과(055)930-3298, 3342
☞주소: 합천군 대양면 대야로 730
☞트레킹 코스: 생태학습관-데크길-장군주먹바위-징검다리2-생태학습관-함벽루-연호사
☞주위의 볼거리: 합천댐, 합천박물관, 조식 선생 생가터, 전두환 대통령 생가, 오도산 자연휴양림, 화양리 소나무,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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