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3·1절과 2·28민주운동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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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01   |  발행일 2021-03-01 제21면   |  수정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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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범 법률사무소 조은 대표변호사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것을 헌법 전문에 다짐해놓고 산다. 법으로 보는 3·1절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국경일이자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이 정하는 공휴일인데, 정부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행사를 성대하게 열고 독립유공자 334인을 포상하면서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3·1절 관련 학생인식에 관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최소한 이미 10여 년 전부터 전국 초·중·고생 10명 중 4명은 일제강점기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을 기념하고자 제정된 3·1절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공휴일을 맞아 사랑하는 우리 다음 세대와 이제 100년도 더 전의 먼 역사가 된 3·1절부터 어제가 기념일이었던 2·28민주운동 이야기를 잠시 나누어보고 싶다.

일제강점기 만주와 일본에서 먼저 발표된 독립선언은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이 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담에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제안하고, 갑작스러운 고종의 죽음이 일본의 독살로 인한 것이라는 의혹이 겹치면서 독립만세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비폭력 저항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조선총독부의 집계에 의하더라도 당시 약 1천600만 인구 중 100만명 이상이, 어떤 학자에 의하면 200만명 이상이 참여한 초유의 대규모 운동이었다. 대구에서도 서문 밖 장날이었던 3월8일부터 남문 밖 장날 등을 기점으로 운동에 동참했다. 중구 청라언덕에 오르는 3·1만세운동길(90계단)을 꼭 한 번 밟아보기를 권한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 우리는 조상들이 그렇게 꿈꾸던 독립된 나라에 살고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독재와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이 직전 선거에서 자신의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야도(野都)로서의 명성이 높았던 대구에서 2월28일 일요일에 유세를 가지려 하자, 이승만 정권이 요즘의 대학생이라 할 수 있는 당시 고등학생들의 유세 참석을 막기 위해 대구 공립 8개교 학생들에게 영화관람과 토끼사냥 등을 이유로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고, 이에 경북고와 대구고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2·28대구학생의거'가 일어났다.

2·28은 오랫동안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아왔으나, 단순한 도화선이 아니라 3·15마산의거와 4·19혁명보다 앞선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운동 그 자체로 보는 시각이 점차 공감을 얻고 있다. 정부도 2018년 '2·28민주운동'을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대구지역 경북고와 대구고 등 학교마다 기념 조형물이, 반월당에는 집결지 표지판이, 두류공원에는 대통령도 참배한 기념탑이, 공평동에는 기념공원이, 남산동에는 기념회관이 있어,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부터 둘러보면 좋다.

2·28민주운동 당시 학생들의 기백이 느껴지는 결의문을 일부 옮겨 본다. "우리 백만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고르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 그 촛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3·1절과 2·28민주운동을 기억하자.
백수범 법률사무소 조은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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