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자산어보' 창대役 변요한 "흑산도 유배 온 정약전, 어부 창대, 주민들 뜨거운 연대, 시사회때 절로 눈물"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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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02   |  발행일 2021-04-02 제39면   |  수정 2021-04-02 08:35
"흑산도 유배 온 정약전, 어부 창대, 주민들 뜨거운 연대, 시사회때 절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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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공부를 왜 하냐?" 흑산도에서 유배 살이하던 학자 정약전(설경구)의 물음에 어부 창대는 퉁명스럽게 답한다. "사람 노릇 하려고요."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창대는 바다생물의 습성과 생태를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지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글 공부다. 이미 독학으로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 등을 뗐다. 그러나 제대로 된 스승 없이 홀로 하는 글 공부는 종종 한계에 부딪힌다. 그렇다고 사학죄인인 정약전의 가르침을 받는 건 성리학을 진리로 여기고 있는 창대의 신념과 가치관에 위배된다. "그러면 내가 아는 지식과 네가 아는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는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는 약전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응한다.

영화 '자산어보'는 1814년 정약전이 저술한 조선시대 어류학서 '자산어보' 서문에 잠깐 등장하는 창대와 정약전 두 인물의 관계에 집중한다. 서로 다른 신분과 삶의 가치관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가는 과정을 시종 경쾌한 리듬에 실었다. 배우 변요한이 창대를 연기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연기 잘하는 배우'로 각인된 그는 그간 쌓아온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기반으로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창대 캐릭터를 완성했다. 함께 호흡을 맞춘 설경구가 "변요한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을 만큼 정말 매력적이다. 외양은 물론 인물의 감정선을 완벽히 이해하고 표현한 배우에게서 느껴지는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흑백화면으로 담아 색채감 없는 만큼 목소리·눈빛 좀 더 도드라지게 연기"

▶'자산어보'는 여러모로 배우에게 큰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4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 같은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엄청난 공부가 되겠구나'였다. 동시에 낯선 인물인 창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접근하려니 조금은 막막했다. 연기 이상의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당시의 청춘과 사회상을 대변하는 창대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가 왜 학문에 심취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지금 시기의 나 같더라. 내가 창대였으면 어땠을까 궁금했고 그걸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또 이 영화가 의미있었던 건 흑백 화면으로 담겨진다는 점이었다. 굉장히 영광스럽고 감사했다. 흑백 화면으로 보여지는 내 모습도 궁금했지만 거기에 맞는 톤과 감성을 살리기 위해 흑백영화에 대한 연구와 탐구가 필요했다. 색채감이 없는 만큼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형태를 좀 더 도드라지게 연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조금은 서툴더라도 더 옳고 바르게 담겨지도록 진실되게 연기하는 것이었다."

▶시사회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다는 얘기로 들린다.

"뜨거움이 느껴졌다. 벗처럼 그려진 정약전 선생님과 창대의 관계도 뜨겁지만 또 다른 벗이라 할 수 있는 주민들 역시 뜨거운 사랑으로 충만돼 있다. 러닝타임 내내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인물인 창대를 응원하다보니 절로 눈물이 났다. 내가 연기했지만 기분이 정말 묘했다. 그 정도로 울림과 여운이 깊이 느껴진 영화다."

▶'자산어보' 서문에 기록된 '장창대'라는 이름 한 줄 외에는 많은 부분을 허구로 채워야 했다.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고 감독의 주문은 뭐였나.

"그래서 준비할 게 많았다. 감독님은 '우선 해봐' '니가 만들어봐'라며 나 스스로 창대 캐릭터를 완성하길 바라셨다. 그런 배려 덕에 굉장히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창대라는 인물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니 일단 능숙하게 생선 손질하는 법부터 배웠다. 전문가에게 생물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분리하는 어류 손질법을 훈련받았고, 전라도 출신 지인들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사투리를 익혔다. 의상 선택도 굉장히 까다로웠는데 일부러 꼬질꼬질하게 보이기 위해 분장을 했지만 흑백이라 더 신경을 많이 썼다. 눈과 손에 난 흉터 자국은 내 아이디어다. 수시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야 하니 낚시 고리에 긁히거나 찍힐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다."



"생선손질 배우고 전라도 사투리도 익혀 눈과 손에 난 흉터 자국은 내 아이디어"

▶촬영 전 흑산도에 다녀온 건 어떤 이유였나.

"촬영지를 미리 가본 건 처음인데 그냥 가보고 싶었다. 굉장히 멀더라. 처음 갈 때는 신나는 마음이었는데 흑산도에 점점 다가갈수록 거리감이 느껴지면서 이곳으로 유배 온 약전 선생님의 심정은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지금도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쉽진 않았는데 그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힘들었을 거다. 흑산도에 도착한 후 운좋게 가이드를 만나 약전 선생님이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 아름다운 섬이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한 감정을 느끼셨을 것 같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마음이 절로 숙연해졌다."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창대가 이강회(강기영 분)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표정이다. 학문에 대한 그의 갈증을 느낄 수 있었다.

"'자산어보'는 너무 계산적으로 연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장면에선 나도 알지 못했던 생소한 표정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사실 창대가 학문에 심취한 건 흑산도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기 위해서다. 그가 강회를 마주하면서 학문과 신분 상승에 대한 갈증을 더욱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양반에게 버림받은 서자 출신인 창대에게 주어진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정약용의 제자이자 양반인 강회와는 여러모로 비교된다. 타고난 신분과 환경이 다르니 창대는 그에게 자격지심과 질투를 느꼈을 거다. 어떤 의도든 '정말 이 친구가 글을 많이 배우고 싶었구나'라는 생각이 관객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흑산도 벗어나 신분상승 욕망에 학문 심취 정약용 제자 강회와 첫 마주한 표정 신경"

▶창대처럼 배움의 갈증을 느꼈던 적이 있나.

"늘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좋은 연기' 딱 네 글자지만 연기라는 건 작품 안에서 누군가의 삶이 돼야 하고, 그들의 아픔·행복·즐거움·슬픔 등 모든 희로애락을 다 표현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까지 그걸 담아낼 수 있을까. 작품에 임하기 전 자기검열과 내 용량을 체크하는 과정을 항상 거친다. '좀 더 편하게 생각해' '쉬엄쉬엄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배움의 갈증과 고민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건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창대를 좀 더 잘 표현하고 싶었다.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고 나를 좀 더 힘들게 몰아가고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엔 완벽하진 않더라도 즐기면 결과가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걸 선배님들과의 작업을 통해 깨달았다."

▶섬에서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것 같다.

"태풍이 세 번 찾아왔다. 날씨를 예상할 수 없어 힘들게 마주한 순간이었지만 그 환경에서도 너무 즐겁게 촬영했다. 오랜만에 하늘도 마음껏 봤고, 별이 쏟아지는 광경도 봤다. 큰 파도가 나를 덮치려고 할 때는 두렵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연과 가깝게 지냈다. 장관이니 절경이니 하는 말을 써 본 적이 없는데 그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 이런 좋은 작품 만난 듯 서사·비주얼적 측면에서 큰 울림·여운"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포인트인 설경구 배우와의 '티키타카'도 빼놓을 수 없다. 그와의 호흡은 어땠나.

"설경구 선배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후배 배우로서 늘 꿈꾸고 동경해왔던 일이다. 그래서 흥분됐다. 현장에선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에게 많은 영감과 지혜를 주셨다. 특히 놀라웠던 건 날씨에 관계없이 매일 아침마다 줄넘기 천 개를 하고 촬영장에 오신다는 거다. 내 숙소가 선배 맞은 편이라 매번 그 장면을 목도했다. 심지어 현장에선 대본도 보지 않는다. 이미 다 외우고 온 거다. 항상 준비된 마음과 자세, 그 안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에너지로 충만돼 있었다. 그런 선배와 연기호흡을 맞추는 것이니 케미스트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배우가 촬영에 앞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걸 깨닫고 배웠다."

▶의외로 낯을 가리고 말까지 더듬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고 있다. 배우의 꿈을 품게 된 계기가 있었나.

"어릴 때는 '여보세요'를 하기 힘들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지금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데, 중학교 때 연극을 처음 접하게 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연극 대사를 외우고 뱉으면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을 느꼈다. 그때부터 신기하게 말이 술술 잘 나오더라. 그 모습을 발견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변한 적도, 배우가 된 걸 후회한 적도 없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서툴지만 연기할 때만큼은 행복하다. 난 이 일이 천성인 것 같다."

▶독립영화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게 지금의 배우 변요한이 있기까지 소중한 자양분이 된 것 같다.

"독립영화 현장에서 배운 게 너무 많다. 현장에 가면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이 현장이 어떻게 돌아갈 건지. 만약 상업영화에서부터 출발했다면, 풍요로운 조건에서만 생활했다면 힘들 때 제대로 버티는 법을 몰랐을 것 같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현장을 살펴볼 수 있고 그 상황에 대처하는 눈치가 생겼다. 그런 경험이 쌓여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자산어보'를 관람할 관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흑백의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영화다. 나 역시 이런 작품을 늘 동경했다. 장면마다 계속 보고 싶어지고, 고민과 생각거리를 준다. 그래서 이 작품을 만난 걸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나 스스로에게 칭찬도 했다. 잘 버텼다고. 그동안 잘 버텼기 때문에 '자산어보' 같은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으니 앞으로 더 힘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사와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큰 울림과 여운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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