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와일드라이프' (폴 다노 감독·2019·미국)...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된다

  • 김은경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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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09   |  발행일 2021-04-09 제39면   |  수정 2021-04-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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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요즘은 영화가 보고 싶지 않았다. 힘든 시기라 그런지, 세상에는 영화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극장이나 집안에 앉아 화면만 보고 있는 것보다는 운동이나 산책이 더 좋은 거라 여겨졌다. 하지만 '와일드라이프'는 이런 생각을 얼마간 바꾸어놓았다. 14세 소년의 시각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요동치는 주변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보고 나니 마치 숨은 보석을 발견한 것 같았다.

1960년대 몬태나로 이사 온 조의 가족은 아버지의 실직으로 위태롭다. 조는 경제에 도움이 되고자 사진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버지는 마을을 괴롭히는 산불 진화작업을 위해 장기간 집을 비운다. 남겨진 엄마는 경제난과 외로움으로 힘겨워하다 의지할 대상을 찾아 나선다. 불안한 눈으로 엄마를 지켜보던 조는 눈이 내리면 오겠다는 아버지를 간절히 기다린다.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오지만 이미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산불이 꺼졌어도 주변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것처럼. 이별이 정해진 부모와 함께 조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가족사진을 찍는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리처드 포드의 소설이 원작으로, 연기파 배우 폴 다노의 감독 데뷔작이다. '루비 스팍스'에서 함께 연기했던 조 카잔과 폴 다노(실제 연인이다)가 함께 각본을 썼다. 캐리 멀리건과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가 뛰어나다. 특히 엄마 역의 캐리 멀리건은 뛰어난 배우임을 증명한다. 감독으로서 폴 다노의 역량도 훌륭하다. 흔들리는 소년의 심리를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몬태나의 풍광과 거대한 산불도 영화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며 메시지를 훌륭하게 전달한다. 제목인 '와일드라이프(Wildlife)'는 야생동물이란 뜻으로, 산불이 나면 타죽고 마는 연약한 존재를 말한다. 산불처럼 거대한 사건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소년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산불이 나면 동물들은 어떻게 돼요"라는 조의 물음에 엄마는 "적응하겠지"라며, 어린 동물들은 타죽기도 한다고 말한다. 다행히도 조는 조금씩 적응해나간다. 아픔 속에서 소년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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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시인·심리상담사

"사람들은 행복한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는 사진관 주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생각해보면 힘든 시간에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이나 가족과 친구와의 한 컷은 모두 행복한 순간들이다. 대수롭잖은 일상의 순간들이 모두 그렇다.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한때 세상의 전부이던 부모가 갈라서자 소년의 세계는 요동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슬아슬하지만 자신을 향한 부모의 변함없는 사랑만이 버팀목이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담담하게 사진을 찍는 소년을 보며 관객은 아픈 마음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산다는 건 이렇게 아픈 일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내 뜻과 상관없이 흘러갈 때가 많다. 그렇게 아픔을 겪으며 나이를 먹고 조금씩 성숙해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우리는 조처럼 어제보다 성숙한 눈빛으로 행복한 순간의 사진을 찍어두어야 할 것이다. '와일드라이프'는 또 다른 방식의 인생예찬인 것 같다.
김은경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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