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죽은 자에 대한 헌사, 碑文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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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09   |  발행일 2021-04-09 제35면   |  수정 2021-04-09 08:39
亡者에 대한 마지막 헌사, 문구 하나에 세상 두 쪽 갈려 피바람 불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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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가 세상을 떠나면 자손들은 고인의 일생을 정리해 행장을 짓고 무덤 앞에는 묘비를 세우고 땅 속에는 묘지를 묻어 망자를 기렸다. 묘비는 이승의 밝은 세계에 여기가 고인의 안식처로서 신성한 곳임을 밝히는 표식이었고, 묘지는 저승의 어두운 세계에 고인을 맡기는 명부였다. 비문은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헌사(獻詞)로 함부로 짓지 않았고 지어주지도 않았다. 비를 세우고 지석을 묻는 일은 어렵지만 해야 할 신성한 의무였다.

사대부가 세상을 떠나면 자손들은 고인의 일생을 정리해 행장을 짓고, 무덤 앞에는 묘비를 세우고, 땅 속에는 묘지를 묻어 망자를 기렸다. 묘비는 이승의 밝은 세계에 여기가 고인의 안식처로서 신성한 곳임을 밝히는 표식이었고, 묘지는 저승의 어두운 세계에 고인을 맡기는 명부였다. 비문은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헌사(獻詞)로 함부로 짓지 않았고 지어주지도 않았다. 비를 세우고 지석을 묻는 일은 어렵지만 해야 할 신성한 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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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의 지석 비문. 1975년 서울 방이동에서 출토됐다.

세상 떠나면 일생정리한 행장 짓고
무덤 앞엔 묘비, 땅에는 묘지 묻어
비문, 집안 품격과 관련 '신성 의무'
함부로 짓지 않고 지어주지도 않아
명재 父비문 문구 당파싸움 휘말려
훗날 명재 "내 무덤엔 세우지 마라"

묘지, 땅의 신에 망자의 육신 청탁
이승에서 저승으로 들어가는 명부
무령왕릉 지석에 '묘지매입' 기록

퇴계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다"
다산 "아득하게 들려 울리리라"
스스로 엄정하게 비명 짓기도

◆행장(行狀)

행장은 일생의 행적을 서술한 것으로 선비가 세상을 떠나면 가장 먼저 짓는다. 고인의 세계(世系), 성명, 자와 호, 관향, 벼슬, 생몰연월, 자손, 언행 등을 기록했다. 행장을 읽으면 고인을 직접 보는 것 같아야 잘 쓴 것이라 여겼고 비문, 만사(輓詞), 시호·증직자료, 전기 등을 작성하는데 사용돼 중히 여겼다.

조선 초기에는 간결했으나 후기에 들어서 남송의 주희 행장을 본받아 장황하고 길게 썼으며, 서인계 인물의 행장은 비교적 길었고 남인계 행장은 간명하고 짧았다. 고려 말부터 지었는데 이색 행장은 권근, 정인지 행장은 강희맹, 이이 행장은 김장생, 류성룡 행장은 정경세, 김성일 행장은 정구가 썼고, 퇴계는 조광조·권벌·이현보 행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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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 온 이듬해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나자 묘비명을 누가 짓는가에 대해 논의가 일어났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전 조카에게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빗돌에 이름만 새기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조정은 관례에 따라 예장으로 치르고 신도비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묘비와 묘갈

묘비는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사각을 '묘비', 둥근 것을 '묘갈'로 구별했으나 나중에 혼용해 사용했다. 비문은 고인에 대한 기록으로 매우 소중하고 집안 품격과 관련되므로 비문 짓기를 누구에게 부탁하는가가 자손들의 큰 고민거리였다. 함부로 지어주지 아니했으며 세의(世誼)가 두터운 고명한 이에게 예를 갖춰 청해야만 했다.

비문의 문구로 발생된 분쟁이 노·소론 분당이다. 명재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 묘갈명을 스승인 송시열에게 부탁했다가 남인에 대한 시각 차이로 관계가 틀어져 분당과 당쟁으로 연결되고 수많은 선비가 목숨을 잃었다. 우의정까지 오른 명재는 이 사건으로 자기 묘에 비를 세우지 말도록 유언으로 남겼다.

비문은 고인의 일생을 산문으로 먼저 서술하고 뒷부분에 운문시를 지어 마무리하는데 이를 명(銘)이라 했다. 시의 함축미로 마감하니 품격이 더해지고 고인을 흠송하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명을 읊조리면 세상을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교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고 정2품 판서 이상 지낸 이들의 비를 '신도비'라 하여 크기가 달랐고 훗날 벼슬이 추증되면 무덤 가까이 큰 길가에 많이 세웠다. 신도(神道)란 죽은 자의 무덤길을 말한다.

◆묘지(墓誌)

묘지는 죽은 이의 행적을 돌이나 도자기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 것으로 원시 신앙과 맞물려 토지신에게 죽은 자의 육신을 맡기는 청탁의 표시이기도 했고 이승세계를 떠나 저승세계로 들어가는 명부였다. 묘비는 마모돼 읽을 수 없어도 묘지는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백제 무령왕릉의 지석은 땅의 신에게 묘터를 샀다는 증표로 국보163호이고 1920년 중국 뤄양 망산에서 발견된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융 묘지석은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왕족·신하 1만2천여 명이 중국으로 끌려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흔적이고, 지석이 발견된 망산은 상두꾼 만가에 나오는 북망산이다.

2008년 북한은 개성에서 고려 말 대학자 이제현의 묘지석을 발굴했는데 가로 6.6m 세로 60㎝의 거대한 석판으로 비문을 이색이 지었다. 1975년 서울 방이동에서 서거정의 묘지석이 출토되었는데 직사각 판형으로 된 백자이며 모두 19장으로 가로 30㎝ 세로 20㎝ 도판에 음각으로 글자를 새겼다.

◆자찬비명

'자찬비명'은 죽음을 앞두고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지은 비명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 쓸 경우 꾸밈과 가식으로 지나치게 미화할 것이 염려돼 자신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엄정하게 내린 글이다. 자찬비명을 쓴 대표적인 인물은 퇴계와 다산이다.

퇴계는 일찍이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뜻한 바를 운문으로 소박하게 지어 놓았는데 퇴계 선생 자명(自銘)이다. 4언 24구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구절은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이 있도다. 승화하여 돌아가리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라고 했다. 하늘의 뜻에 따라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삶이니 더 무엇이 바라겠느냐고 흐르는 물처럼 맑고 고요하게 마감했다.

다산 정약용은 노론 치하 세태에 묘비 글을 지어 세상에 드러낼 수 없으므로 묘지 글을 지어 자신을 달래고 땅에 묻었다. 지난날의 악연을 언급하면서 착한 것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했으나 행동하고 실천함에 과단성이 있어 화를 당했으니 운명이라 여겼다. 마지막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펼쳤으나 하늘이 곱게 다듬었으니 잘 거두어 속에 갖춰 두면 장차 아득하게 멀리까지 들려 울리리라'고 자신에게 노래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참혹함을 견디고 마침내 자신의 피땀으로 지은 수많은 저술에 대해 후대의 평가를 기다리겠다는 안온함과 잠시 비껴갈지 몰라도 역사는 다시 바르게 흘러간다는 준엄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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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지석 비문. 지신(地神)에게 묘터를 매입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買地券)으로 국보 163호다.

◆퇴계의 묘비명

퇴계 이황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 온 이듬해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나자 묘비명을 누가 짓는가에 대해 논의가 일어났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전 조카에게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빗돌에 이름만 새기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조정은 관례에 따라 예장으로 치르고 신도비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손과 제자들은 협의를 거쳐 호남의 고봉 기대승에게 비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퇴계는 1569년 부친의 묘비를 다시 세우면서 비문을 고봉에게 짓도록 했고 이언적의 비명을 부탁받았으나 명현의 덕은 여러 사람이 칭송해야 한다며 이 또한 고봉에게 짓도록 했으니 퇴계는 7년간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고봉에게 일찍이 비문 인가를 내린 셈이다. 학봉과 서애는 삼십 전후로 아직 현달하기 전이었고 퇴계 제자들은 이런 연유로 비문 짓는 영광을 고봉에게 넘겼다.

고봉은 퇴계가 쓴 자명을 앞에 싣고 비문을 지었다. 보통 명은 뒤에 붙이는데 퇴계가 쓴 자명인 만큼 존경의 의미로 앞에 실어 잘 드러나게 했다. 아울러 비를 세우고 20여 년이 지나 1596년에 묘지석을 묻었다.

고봉도 퇴계의 명을 지었는데 비문에 자명이 있으니 싣지 못하고 광명(壙銘), 즉 '땅에 묻은 명'이라 하여 돌에 새기지 못하고 그의 문집 고봉집에 실었다. 명의 마지막이다.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할 것을 내 아노라. 선생의 의복과 신발이 이 산에 의탁해 있으니 천년 후에도 행여 이곳을 유린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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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쓴 묘지명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죽은 인물 이가환·권철신·이기양·오석충의 묘지명을 지었다.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지은 글이지만 세상에 드러내면 다시 앙화를 당하니 글로써 고인을 달래고 땅에 묻어 억울한 죽음을 저승세계에 알리려 했다. 절친했던 이가환의 묘지명에 '만물은 끝내 모두 죽는 것이니 대감만이 홀로 원통한 것은 아니리'라고 달랬고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백세 뒤엔 다시 대감을 알 사람이 없겠기로 이 변변치 못한 글을 땅에 묻어 하늘의 뜻을 살피겠노라'고 했다.

이덕형 7대손 이기양은 장남 총억이 천주교 신자라 배소인 함경도 단천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묘지명에 '대감은 평생 천주교 서적 한 글자도 읽지 않았지만 화를 당했고 대감과 같은 죄목으로 귀양을 갔던 나는 살아서 돌아왔는데 대감은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실로 억울한 죽음이요, 대감의 관(棺)이 북에서 오니 깃발만 펄럭이고 백성들은 슬퍼하면서도 영광으로 여긴다'고 했다.

친한 벗 오석충의 묘지명에는 다산 자신도 귀양살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전라도 임자도에서 귀양살이하는 공(公)에게 보냈더니 공은 이미 죽어 한 달이 지났다. 녹봉을 받으면 식량을 사주고 땔감도 나누던 옛 벗이었건만 공이 죽은 날짜도,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이 묘지를 지어 공의 무덤을 아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이같이 비문은 죽은 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헌사로 역사가 되고 전설이 되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황희 비명은 신숙주, 한명회 비명은 서거정…조선사대부 2천여명 전기 수록
총 74권의 필사본 '국조인물고' 눈길


국조인물고
조선 초부터 숙종 때까지 주요 인물의 비문을 엮은 '국조인물고'. 총 74권의 필사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비문을 엮어서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정조 때 만든 국조인물고는 조선 초부터 숙종 때까지 주요 인물에 대한 비문을 엮은 책으로 74권의 필사본이다. 수록 인물의 묘갈명, 묘지명, 행장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을 골라 그대로 실었다. 2천여 인물의 비문 전기가 수록돼 있으며 국역으로 완역되었고 사대부 일생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비문이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비문을 지은 이는 당색에 따라 완연하게 구별되었다. 서인계 인물은 송시열·이정구·신흠 등이 많이 지었고, 남인계 인물은 허목·조경·정경세가 주로 지었다. 역사 속 인물의 비문을 살펴보면 황희 비명은 신숙주, 한명회 비명은 서거정, 이순신 비명은 대동법의 재상 김육이 지었다.

서인계 인물인 이항복 비명은 신흠, 이정구 비명은 김상헌, 정철 비명은 송시열이 썼고, 남인계 인물인 김성일 비명은 정경세, 이덕형 비명은 조경, 장현광 비명은 허목이 썼다. 퇴계는 이연경 비명을 썼는데 사촌인 영의정 이준경의 부탁으로 지은 듯하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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