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거듭나기

  • 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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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12 07:46  |  수정 2021-04-12 07:50  |  발행일 2021-04-12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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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대 교육학과〉

불교의 윤회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윤회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심한 분노와 고통 속에 있으면 곧 지옥에 있는 것이요, 강한 욕망에 끌려 행동하고 있으면 축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내세도 반드시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세는 지금의 삶에서 거듭난 삶을 말하기도 한다.

거듭남을 기독교에서는 '중생(born again)'이라고 한다. 중생은 바울이 고백한 대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디아서 2:20)"와 같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과거의 바울은 죽고 새로운 바울이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이 새것이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5:17)"라고 고백하였다.

거듭나기 이전에 인간의 자아는 세계와 분리되어 있어 어둠 속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 자기중심적이기에 교만하고, 어둠 속에 있기에 근심 속에서 살아가며, 어리석기에 분노와 폭력의 삶을 산다. 세계와 분리된 자아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 세계에 갇혀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인간이 겪는 선과 악이라는 거대한 모순에 대해 "우리의 위대함과 우리의 비천함은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그 놀라운 모순을 설명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기독교에서는 이 모순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에덴의 동쪽, 즉 낙원 바깥에서 소외와 자아 집착과 자아 팽창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가 가르치듯 삶은 서로 대립하는 두 힘인 선과 악의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인 지고의 상태에서는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고 전일체로 존재한다. 악을 떠난 선은 상상할 수 없으며 선이 없는 악도 존재할 수 없다. 선과 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최고의 진리를 망각한 상태가 바로 무명(無明), 곧 어둠이다. 궁극적인 진실은 모든 이원성이 하나로부터 태어나고 그 하나 속으로 다시 용해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곧 에고의 죽음을 뜻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참된 자기를 회복하였다는 뜻이다. 이러한 거듭남의 체험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과 같이 갑작스러운 체험일 수도 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처럼 점진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거듭남이란 과거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이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공통된 체험이다. 이슬람교에서 '이슬람'이라는 말의 한 가지 의미는 '항복한다'이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써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곧 이슬람 신자로 거듭남이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너희가 죽기 전에 죽어라'고 가르쳤다.

거듭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유, 기쁨, 평화,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사랑이다.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니콜라스 베르자예프는 빵을 먹는 것은 물질적 행위이고 빵을 나누는 것은 영적 행위라고 하였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사랑 속에서 행동한다. 일반적인 경우 우리는 먼저 알고 난 다음에 행동을 하지만,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먼저 행동한 다음에 알게 되고 먼저 참여한 다음에 알게 된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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