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여행] "시름 잠시 내려놓고 쉬어 가시게…" 청도 박곡리 천년고찰 대비사 부도밭 '말없는 설법'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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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23   |  발행일 2021-04-23 제13면   |  수정 2021-06-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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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대비사 부도밭. 고승대덕의 부도 11기가 모여 있다. 부도들은 원래 대비지 자리에 있었는데 저수지를 만들면서 대비사 앞 개울가에 옮겨놓았다가 현재의 부도밭으로 모셨다.

아늑하다. 산도, 들도, 마을도, 어느 것도 압도적이지 않고 시시하지도 않다. 길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한산하며 울타리 없는 과수원의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점점이 늘어서있다. 이곳에서 넘치는 것은 계절이다. 이 계절 이 땅은 연분홍과 연둣빛으로 넘쳐난다. 들에는 복숭아나무·자두나무·대추나무·감나무, 산에는 산벚과 참나무·생강나무·소나무·노간주나무, 또 온갖 수목들. 그네들이 일제히 터트려놓은 고양이처럼 보드라운 색채들이 내 눈을 어루만져 터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다. 청도 박곡리 대비사 가는 길, 아름다움과 건강함으로 충만하다.

신라시대 '소작갑사' 명맥 잇는 사찰
고려초 보양스님이 위치 옮겨 건립
보물 834호 대웅전 조선 중기 건물
고승 부도 11기 모신 부도밭 '아늑'
인근엔 보물 박곡리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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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사로 가는 박곡리의 들은 복사꽃이 한창이고 산에는 산벚이 화사하다.

◆ 박곡리

박곡리(珀谷里)는 운문지맥인 억산(億山) 아래에 자리한다. 길은 한길, 억산 아래로 향한다. 그래서 거쳐 가는 곳이 아니라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마을이다. 억산은 해발 954m로 하늘과 땅 사이 수많은 명산 중의 명산이라는 억만지곤(億萬之坤)에서 유래했다. 그처럼 높은 산 아래 있지만 압도의 느낌이 없는 것은 골이 넉넉해서 일 게다. 박곡리의 박(珀)은 보석의 일종인 호박(琥珀)을 뜻한다고 한다. 호박은 광택이 있는 노란 광물로 지질 시대 나무의 진 따위가 땅속에 묻혀서 화석화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에 박곡리는 박석동(珀石洞)이라 되어 있다. 틀림없이 흙과 돌이 특별한 땅이라는 의미일 게다. 실제 옛날부터 도자기가 발달했었고 지금도 마을 위쪽에 내화 벽돌을 만드는데 필요한 규석 광산이 있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박곡, 미륵당, 골안, 한질각단 등이 있다. 박곡은 백곡이라고도 불린다. 옛날 주위에 계곡이 백여 개나 돼서 백곡이라 했다고 한다. 한질각단은 신작로가 생긴 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생겨난 마을이다. 골안은 마을 초입에 있는 골짜기다. 미륵당은 불상이 있는 마을로 박곡리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박곡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아담하게 펼쳐진 새들 앞에 붉은 사주문이 있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으로 둘러싼 작은 경역 안에 한 칸의 보호각이 자리한다. 사람들은 이 보호각을 '미륵당'이라 부른다. 미륵당 마을의 미륵당 전각 안에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물 제203호인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이다.

흠칫 놀란다. 부처님의 얼굴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마치 얼굴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것 같기도 하다. 불상은 몇 차례의 화재를 겪었고 인위적인 파손도 당했다고 한다. 가만히 마주하면 보이지 않는 표정이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다가온다. 어깨는 넓고 둥글다. 가슴은 당당하고 허리는 잘록해 전체적으로 강건함과 안정감을 준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는 신체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려 다리까지 이어진다. 손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악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른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은 통일 신라 때의 석불로 석굴암 불상을 잇는 전성기 조각이라 한다. 이 불상은 1918년에 조사된 바 있다. 당시 사진 속 부처님은 이목구비와 나발이 뚜렷했다. 사진으로 확인되는 광배도 지금은 없다. 마당에 고려 시대 석탑 1기가 서 있다. 상층기단과 1층 탑신부, 2층 옥개석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한쪽에는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새겨진 석조 광배가 세워져 있다. 석조여래좌상과의 연관성은 알 수 없고 이 역시 파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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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갑사 중 하나인 소작갑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도 대비사.

◆ 대비사

인가가 드물어지고 산줄기들이 점차 다가와 대비지(大悲池)를 조형해 놓을 즈음에서야 억산의 기개를 실감하게 된다. 대비지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물 가둠이 좋은 흙 성분 덕분에 물이 모자라는 일은 그다지 없다고 한다.

초록빛 저수지를 휘돌아 억산 골짜기로 들어가며 마침내 드높은 산에 푹 파묻힌다. 길가에 사천왕이 서 있다. 모양이 제각각인 큰 바위에 섬세하게 새겨진 마애상이다. 운문사 작압전에 모셔져 있는 사천왕을 모태로 조각한 것이라 한다. 보호각의 어둠 속이 아닌 푸른 하늘 아래 꽃나무와 나란히 서 있으니 무서운 모습도 웃는 얼굴 같다.

속닥거리듯 낮은 물소리 들린다. 물방울처럼 가벼운 새소리 들린다. 아주 먼 데서 울려오는 듯한 풍경소리와 함께 커다란 누각이 나타난다. 대비사의 입구인 용소루(龍沼樓)다. 누하의 계단 앞에서 대웅전 편액을 마주한다. 대웅전의 시선은 앞산 너머 운문사를 향해 있다.

1718년에 간행된 '청도군 호거산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진흥왕 18년인 557년에 한 신승이 운문산에 들어와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7년 동안 다섯 개의 갑사(岬寺)를 건립했다고 한다.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 '소작갑사(小鵲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 그리고 가운데 '대작갑사(大鵲岬寺)' 이렇게 '오갑사(五岬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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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사 대웅전은 보물 제 834호로 조선 중기의 건축물이다.

오갑사는 신라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원광법사에 의해 중창된다. 이후 오갑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혼란 시기에 대부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대작갑사와 소작갑사는 고려 초 보양스님에 의해 새로이 지어졌다. 대작갑사는 오늘의 운문사이며 소작갑사는 오늘날의 대비사다. 보양국사는 중창 때 소작갑사의 위치를 옮겼다고 한다. 소작갑사의 원래 위치는 박곡리 미륵당에서 약 900m 떨어진 북쪽 계곡 중턱의 베틀바위 부근 절터로 여겨진다.

대비사(大悲寺)라는 이름은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에서 왔다고도 하고 신라시대 왕실의 대비가 수양을 위해 이 절에 오랫동안 머물러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대웅전은 보물 제834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 건축물이다. 창건 후 몇 번이나 화를 당했지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간결하고 남성적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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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3호인 박곡리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몇 차례의 화재와 인위적인 파손을 겪었다.

대웅전 뒤편에는 2016년 조성된 용두관세음보살이 있다. 육중한 바위에 날듯이 새겨진 마애불이다. 감로수 떨어지는 소리가 너른 마당을 울린다. 커다란 바위들 사이로 난 돌계단 위로 꽃들로 얼굴 가린 삼성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구름과 강가에/ 한가로운 사람이 있네./ 낮에는 청산에서 노닐고/ 밤에는 바위 밑에 와 잠드네.' 삼성각 주련이 한 편의 시다.

대웅전 영역을 벗어나 계곡을 따라 오솔길을 잠시 오르면 대비사 부도밭이 있다. 소요선사, 수월대사, 태능대사, 취운대사, 학린대사 등 고승대덕의 부도 11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한때 이 절은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가. 부도들은 원래 대비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저수지를 만들면서 대비사 절 앞 개울가에 옮겨놓았다가 현재의 부도밭으로 모셨다. 그리고 마애불을 새기고 천진보탑이라 명명했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맑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장소다.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좋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움직임의 한 가운데에 휘말린 듯 아늑하다. 참 아늑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IC로 나간다. 경주방향 20번 국도를 타고 가다 매전교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신지리 마을 안 사거리에서 박곡, 박곡리 석조여래좌상, 대비사 이정표 따라 우회전해 계속 가면 된다. 박곡길로 가다 보면 미륵당마을 길 좌측에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보호각이 있고 길 끝에 대비사가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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