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 교수의 '톡! 톡! 유럽'] 유럽통합·평화의 물꼬, 석탄철강공동체서 시작

  • 안병억 교수
  • |
  • 입력 2021-04-30   |  발행일 2021-04-30 제21면   |  수정 2021-04-30 07:35
프랑스, 독일에 땅 뺏긴 치욕 갚으려 70년간 보복정책 반복
2차대전 후 야심차게 추진한 佛 경제성장 계획 실패하자
석탄·철강 생산 활발한 독일에 공동관리안 손 내밀어 협력
1·2차대전 책임있는 獨 전략물자 유럽이 견제해 평화담보
유럽경제공동체 출범의 모태…유럽연합(EU)까지 이어져

1142764802
2021042701000939400038762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50대 독자들은 고교 국어책에서 배웠던 '마지막 수업'을 기억할 듯하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지역인 알자스-로렌이 하루아침

에 프랑스 땅에서 독일로 주인이 바뀌었다. 프랑스인들은 모국어를 버리고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국어(프랑스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교실은 눈물바다가 됐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작품이다.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철혈재상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6개월 만에 굴복시켰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역사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됐다. 프랑스의 치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통일 독일제국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선포됐다. 우리나라 역사에 비유하자면 일본이 제국을 경복궁에서 선포한 셈이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수십 년에 걸쳐 건설한 프랑스의 자존심 베르사유 궁전에서 적국 독일이 제국 성립을 대외에 알렸다.

이후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보복은 양차대전의 전후 처리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반복됐다. 그러다가 두 나라는 유럽통합의 틀 안에서 보복의 악순환을 끊게 됐다. 70년 넘게 양국 국민에게 유전되었던 보복의 역사가 끝났고 이 과정에서 석탄과 철강이 중요했다.


2021042701000939400038763
쉬망선언의 로베르 쉬망 외무장관.


◆프랑스의 계속된 대 독일 보복정책과 경제 현대화 계획 실패

1차대전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전후 처리를 타결한 베르사유 강화체제에서 대 독일 강경정책을 고집했다. 독일이 부담할 수 없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빼앗겼던 알자스-로렌 지역을 되찾았다. 그리고 라인강 왼쪽의 땅을 중립지대로 만들었고 독일이 배상금을 갚지 못하자 이 땅을 점령하고 독일을 압박했다.

패전국 독일이 보기에 베르사유 강화체제는 일방적 강요였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는데 왜 독일이 이처럼 과도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하는가? 1차대전 후 출범한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 바이마르공화국은 안팎의 위기에 시달렸다. 1920년대 중반 인플레이션이 수만 퍼센트(%)가 되어 빵 한 조각 가격이 수억 마르크 정도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베르사유 체제의 타도와 독일 자존심 회복을 내세운 극우정당 나치(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 정당. 여기에서 사회주의는 개인을 희생하고 국가를 우선하는 집산주의를 말한다. 정작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가 세력을 불려 결국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다.

2차대전 후 프랑스는 또다시 철저한 대 독일 보복정책을 반복했다. 소련과 미국·영국·프랑스 등 히틀러에 대해 승리를 거둔 4개국이 독일을 분할 통치했고 프랑스는 소련처럼 전쟁 배상금의 하나로 독일 산업시설을 해체하기도 했다.

1차대전 후 프랑스의 대 독일 강경정책이 히틀러의 대두를 야기한 원인의 하나였지만 프랑스는 2차대전 후에도 동일한 정책을 실행했다. 그러면서 프랑스는 경제 발전 계획을 실행했으나 실패했다. 프랑스인 장 모네(Jean Monnet)는 미국과 영국의 통치 엘리트와 긴밀한 네트워크를 유지했고 2차대전 중에도 미국이 프랑스에 무기대여를 제공하는데 기여했다. 모네는 2차대전 후 경제 현대화 계획의 입안자로 활동했다. 여기에서 석탄과 철강이 핵심이었다. 철강은 무기를 만드는 필수 원자재였고 석탄은 당시 대부분의 전기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물자였다. 하지만 그가 1947년부터 실행했던 경제 현대화 계획은 실패했다.

◆프랑스의 대 서독 포용정책과 통합의 물꼬를 튼 석탄철강공동체(ECSC)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공업지대는 석탄과 철강이 풍부하다. 프랑스는 2차대전 후 야심차게 추진한 경제 성장 계획이 실패하자 대독일 강경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나온 게 석탄과 철강의 공동생산과 관리다.

장 모네는 대 서독 강경정책을 중단하고 1949년 건국된 신생 서독을 동등한 파트너로 대우하면서 전쟁에 필수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관리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당시 외무장관이던 로베르 쉬망에게 전달했고 쉬망은 1950년 5월9일 기자회견에서 이를 발표했다.

쉬망은 알자스-로렌 출신의 부친 밑에서 자랐고 1차대전 중 독일 측에서 복무했다. 1차대전이 끝나서야 프랑스인이 된 그는 전쟁의 참화를 몸소 체험했고 석탄과 철강의 공동생산과 관리가 왜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1·2차 대전의 책임이 있는 독일에 풍부한 전략물자를 유럽이 공동으로 통제하고 관리해야 평화를 담보할 수 있었다. 1871년 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인 10% 정도가 전쟁의 참화를 직간접으로 겪었다.

쉬망의 선언에 서독이 화답하고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이 참여하면서 1951년에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가 출범했다. 석탄철강공동체는 유럽통합의 물꼬를 텄다. 석탄과 철강의 공동생산과 관리가 경제 전 분야로 확산되면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1958년 출범했다. 70여년이 지난 지금 유럽연합(EU)은 27개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다. 회원국 간의 상품과 서비스, 자본뿐만 아니라 회원국 시민들도 아무런 장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을 이뤘다. 19개 회원국은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단일화폐 유로를 사용해왔다.

다음 달 9일 EU의 여러 기구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의 날 행사가 열린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EU대표부(대사관)가 있는 130여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통합의 물꼬를 튼 이날을 기념한다. 이 행사에는 '유럽'의 국가가 할 수 있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가 연주된다.

유럽을 연구하면서 종종 우리와 동북아시아의 현실을 유럽과 비교하게 된다. 16~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민족주의 국가를 먼저 확립한 유럽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민족주의의 폐해를 극단으로 겪었다. 2차대전 후 유럽은 민족주의를 극복하고자 국가 주권을 '유럽' 차원으로 이양하는 통합을 실행해왔다. 통합 과정에서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통합은 그래도 꾸준하게 점진적으로 진전돼왔다. 반면에 동아시아는 민족주의의 파고가 여전히 매우 높다. 아무래도 2차대전 후 독립을 쟁취한 국가가 많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길들이려면 통합을 단행해야 하는데 민족주의가 통합의 장애가 되기도 한다.

북한에는 구리, 철광석, 니켈, 무연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계속되면서 북한 지하자원의 채굴권 등 상당한 경제적 이권이 중국의 손에 넘어갔다. 안타깝다. 우리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지하자원이 결합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다. 남북 간의 평화공존과 상생을 쉼 없이 준비해보자.
안병억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