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지산 팔거산성서 대구 첫 신라 목간 11점 출토

  • 임훈,이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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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29 07:43  |  수정 2021-04-29 07:56  |  발행일 2021-04-29 제16면
문화재청·화랑문화재硏 발표
제작시점 추정 간지·곡식명 등 수록
산성의 왕성한 행정·군사기능 짐작
"함지산 전역 사적으로 지적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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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대구 북구 노곡동 함지산 팔거산성에서 화랑문화재연구원 관계자들이 7세기 초반 신라시대 목간(木簡·문서나 편지 등의 글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또는 대나무 조각에 적은 것)이 출토된 집수지 주변 발굴 현장을 공개하며 유물에 균열을 막기 위해 물을 뿌리고 있다. 작은 사진은 팔거산성 집수지에서 출토된 목간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임훈기자
대구 북구 함지산 팔거산성에서 대구 최초의 신라 목간(木簡·문자가 기록된 나무조각)이 출토됐다. 문화재청과 <재>화랑문화재연구원은 발굴조사 중인 팔거산성 집수지(集水地)에서 7세기 초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출토됐다고 28일 밝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신라 목간 11점 가운데 7점에서 글자가 보이고, 그중에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이 등장한다. 4점의 목간에서 크게 3종류의 간지가 발견됐으며, '임술년(任戌年)'과 '병인년(丙寅年)', 그리고 간지 중 두 번째 글자 일부와 세 번째 글자 '년'만 보이는 사례가 등장한다. 임술년과 병인년은 각각 서기 602년과 606년으로 추정되며 이는 목간 작성 시점으로 보인다. 또한 목간에서는 보리(麥)와 벼(稻), 콩(大豆) 등의 곡식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산성에 물자가 집중된 상황을 보여주고 산성의 행정 및 군사기능을 짐작케 한다.

특히 팔거산성은 대구와 경산 영천을 잇는 거점이기에 왕경(경주)을 방어하는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7세기 초반 무렵, 신라 왕경 서쪽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로 팔거산성이 이용됐다는 것이 문화재청 측의 설명이다.

한편 목간에서는 '왕사(王私)'와 '하맥(下)'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들 표현의 의미는 아직 추정이 어렵다. 왕사의 경우, 기존 경남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보이는 '왕송(王松)'과 같은 표현으로 추정했으나 '송(松)'을 '사(私)'로 수정해야 함을 밝혀냈다. 다만 왕사, 하맥의 의미해석은 추가 연구과제로 남았다.

대구시 기념물 제6호인 팔거산성은 대구 북구 노곡동 산1-1에 자리하며, 인근에는 2018년 사적으로 지정된 구암동 고분군이 있다. 이 산성은 2015년 지표조사, 2018년 시굴 조사를 거쳐 지난해 10월부터는 학술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석축 7기, 추정 집수지 2기, 수구(水口) 등의 유구가 발굴됐다. 특히 신라 목간이 출토된 집수지는 길이 7.8m, 너비 4.5m, 높이 약 3m이며 면적은 35㎡, 저수용량은 약 10만5천300ℓ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팔거산성은 신라가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요지다. 이번 발굴은 삼국통일 완료 시점까지 중요한 군사적 기능을 담당한 팔거산성의 일면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팔거산성 주변으로 구암동 및 팔달동 유적이 모여 있다. 이는(신라 신문왕(681~692) 재위 당시) 신라의 수도를 경주에서 대구로 옮기려 한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함지산 전역을 사적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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