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7월6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
연장전 마지막 18번 홀에서 박세리가 드라이버샷으로 날린 공이 워터해저드(연못) 바로 앞 경사가 가파른 러프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던 박세리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연못 속으로 들어가 어드레스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웨지 샷으로 공을 높이 띄워 안전지대로 빼냈다. 그 유명한 '맨발의 투혼 샷'이다.
박세리는 이 샷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이어진 연장 두 번째 홀에서 승리하며 한국인 최초 메이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당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로 실의에 빠져있던 온 국민에게 뜨거운 감동과 함께 희망과 용기를 선사했다.
23년이 흘러도 스포츠가 주는 감동과 열광은 변함이 없다. '각본 없는 드라마'여서다.
2021년 현재 대구를 비롯해 온 나라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으로 1년 넘게 몸살을 앓고 있다. IMF 못지않은 실의에 빠져있는 대구시민에게 23년 전 그날처럼 용기를 내라며 감동을 주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있다.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와 프로축구 대구FC가 요즘 보여주고 있는 화끈한 경기력이다. 나는 이를 '코로나 희망가'로 부르고 싶다.
삼성은 지난달 28일 올 시즌 처음으로 단독 선두에 등극했다. 2015년 10월6일 정규리그를 1위로 마감한 이후 2천31일 만이었다. 이후에도 삼성은 LG와의 3연전(4월30일~5월2일)에서 '스윕'(3전 3승)을 가져오면서 현재 리그 1위(16승10패)를 달리고 있다. 그 옛날 '삼성 왕조시대'라 불리며 국내 프로야구계를 호령하던 시절의 모습을 되찾은 분위기다. 덩달아 팬들도 "요즘 살맛 난다"며 야구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대팍) 전체 관중석의 30%인 7천33석 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근 두 경기 연속 매진 사례를 빚는가 하면, 표를 구하지 못한 수많은 팬들이 대팍 담장 밖에서 빼곡히 모여 경기를 관람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구FC도 요즘 승승장구하고 있다. 올 시즌 K리그1 10라운드에서 FC서울을 만나 1-0으로 이기더니 수원삼성(1-0), 광주FC(1-0), 수원FC(4-2)를 잇따라 격파하며 내리 4연승을 질주하고 있다.
대구 공격의 핵 세징야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장기 부상에서 회복한 에드가가 4경기 연속 골로 팀을 리그 4위로 끌어 올려놨다. '세징야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건 대구로선 큰 수확이다.
지난 6라운드 2020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우승팀인 울산현대를 맞아 이근호의 동점골과 세징야의 극장골로 짜릿한 대역전 드라마를 쓸 땐 DGB대구은행파크가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대구에서 도대체 얼마 만에 울려 퍼진 함성이었는가. 당시 그 순간만큼은 코로나도 먹고살 걱정도 고민거리도 싹 잊고 대구의 승리만 만끽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마음껏 분출했다. 이게 코로나 희망가가 아니면 뭐라 불러야 하나.
삼성라이온즈와 대구FC의 리그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여세를 몰아 올 시즌 삼성은 '가을야구', 대구는 '파이널A' 진출을 통해 동반 우승까지 거머쥘 순 없을까. 절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한 대구시민들이 충분히 받을 만한 선물이다.
진식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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