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가인 김병로 선생 생가 터…청빈한 법조인이 어린시절 노닌 명당…산새와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 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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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6-11   |  발행일 2021-06-11 제36면   |  수정 2021-06-1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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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생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역임, 정치 킹메이커 김종인 前 비대위원장이 손자
법조 '3聖'으로 추앙…6·25전쟁 때 소실된 안채·문간채 후손 고증거쳐 복원
담양 야산에 모신 부인 산소, 선산 네 곳에 정성스럽게 관리된 선조묘도 감탄
가인 정신 들불처럼 일어나 공정·정의가 바로서는 세상 만들어지기를 기원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였다. 유월의 바람이 흔드는 녹색나뭇잎에 현기증이 난다. 경남 거창휴게소는 이름과 달리 거창하지 않았다. 여기서 보는 미인봉이 더 거창 한 것 같았다. 미모의 처녀가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아름다운 형상의 미인봉. 자연의 걸작품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여기도 전설이 있다. 옛날 위독한 어머니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이 산을 오른 처녀가 뱀에 물려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긴 산신이 죽은 처녀의 형상을 본떠 산을 다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전설에는 효(孝)와 신(神)의 메타포가 스며 있다. 솔직히 우리는 더 많은 전설을 찾아내고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가야 한다. 전설은 우리의 다양한 환상과 꿈, 미래의 시간을 불러오는 주술이고 마법이다. 그 알량한 권력과 돈, 그리고 쾌락이 선(Good)이라는 과녁을 잘못 쏘는 격발 때문에 우리는 할매 약손 같은 전설과 꿈 환상 미래를 마구 퍼다 버렸다. 저 미인봉을 보고도 무의식을 지배하는 전설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의 가치는 그야말로 한줌의 먼지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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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생가 정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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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재실.

갈 길이 멀어 이쯤에서 우리는 차에 올랐다. 그가 말을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세발솥처럼 삼권분립이 그 생명입니다. 광복 후 미군정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시작되고 1948년 초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며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우리 손으로 자유 민주정치를 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엉망진창이 된 겁니다. 아무런 경험 없이 그 까다로운 자유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성공할 리가 없죠. 그래서 외국의 어느 신문에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과 같다' 라고 비유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양 바퀴는 부(富)와 교육(敎育)입니다. 전 국민의 소득과 교육 수준이 선진국으로 올라서고 부유층·중산층·빈곤층이 다이아몬드를 이룰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삼권분립을 잘 지키고 경제와 교육을 세계 10대 강국으로 만든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서슬 퍼런 대통령 중심제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문맹인 국민 속에서, 1948년 초대 대법원장으로 부임한 가인(街人) 김병로 (金炳魯) 선생이 1957년까지, 두 번 임기에 걸쳐 삼권분립의 정치적 균형을 정말 꿋꿋하게 지켰습니다. 정치적 카리스마가 하늘을 찌르던 이승만 대통령도 김병로 대법원장의 사법수호 정신만은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선산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선산 일부.

그럭저럭 김병로 선생 생가 터에 도착했다. 안내판은 이러했다. "이곳은 대한민국 초대·2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의 생가 터다. 조선 중기 도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세손인 가인 김병로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일정 강점기 변호사 시절에는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무료 변론과 1948년 대한민국 초대·2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가로서 우리나라 사법부 역사상 법조 3성(聖)으로 한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법조인으로부터 가장 추앙을 받고 있다.… 안채와 문간채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분의 빛나는 업적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어록도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부정의에 빠져 간다 할지라도 우리 법관만큼은 정의를 최후까지 사수해야 할 것이다.'(1954년 3월 법관 훈련 회동 강의) '법관으로서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사법부의 위신을 떠나야 한다.'(1954년 10월 전국 법원수석 판사 회의) '모든 사법 종사자들에게 굶어 죽는 것은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다.'(1957년 12월16일 퇴임식). 사법부의 청렴과 명예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긴 쌀밥 같은 경구(警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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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산소.

생가 터는 명당 터라고 한다. 답사를 마치고 우리는 김병로 선생 부인 산소로 향했다. 전남 담양 어느 야산에 산소가 있었다. 상석 옆 손자의 줄에 종인이란 성명이 나온다.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 김종인 선생을 말하는 거다. 김종인 선생은 가인 김병로 선생의 손자였다. 솔직히 김종인 선생만큼 카리스마와 매직을 가진 정치가도 드물 것이다. 한국정치에서 킹메이커, 뉴스메이커로 유명하다. 그분은 발군의 경세가, 전략가, 정치 컨설턴트로 불린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2016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도와 두 번의 대선에서 모두 이겼다. 그리고 이번 4·7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 '김종인 매직'이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분은 다섯 번의 국회의원을 비례대표로만 지냈다. 전무후무하다. 더 거슬러 가면 박정희 대통령 때는 경제 자문으로, 전두환 대통령 때는 경제 가정교사로, 1987년 대선 때는 여론조사기법을 처음 도입했고 노태우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2002년에는 노무현, 2007년에는 이명박 후보가 자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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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가는 길에서 본 당산나무.

이곳 말고도 김병로 선생 선산 네 곳을 더 답사했다. 후손 발복과 국가인재 배출을 위해 애면글면 명산 명당에 산소를 모신 그 정성과 전통이 곡진해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귀가하는 차안에서 정치가 화제가 되었다. "문 정부 4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는 호흡을 고르고 "문정부 키워드는 내로남불(naeronambul)입니다. 최근 4·7 지방선거 해당일자에 미국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이글은 'If they do it, it's a romance : if others do it, they call it an extramarital affair'. 번역하면 '자신들이 하면 로맨스이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면 불륜이라 한다'입니다. 이 말은 문 정권을 상징하는 국제어가 되었습니다. 초강대국인 미국의 유력지에 실린 기사는 도미노처럼 세계에 퍼집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을 만든 한국의 권력자들은 부끄러움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내편 무죄, 남 탓, 전 정부 탓, 문 정권의 해시태그로 입방아에 오르내립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다고 강조한 문 정권입니다. 숨이 턱턱 막힐 일입니다. 드루킹 김경수, 조국 전 장관과 자녀, 박원순·오거돈·안희정 성범죄, 위안부 할머니의 후원금을 슬쩍 꿀떡한 윤미향, 울산시장 선거, 라임옵티머스, 유재수 전 부시장 감찰 무마, 이상직 사건 등등과 국책사업을 뒤엎은 탈원전·가덕도 신공항 등 너무 많아 멀미가 납니다. 게다가 조국 사태 뭉개기, 윤석열 밀어내기, 야당 따돌리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문 정권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1년에 몇 번씩 지원금·위로금만 뿌리면 포퓰리즘에 길들여진 국민이 표를 몰아 줄 것이고 선거 승리는 이어질 것이라고 자신해 무법·무책임 전횡을 했습니다. 근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갖은 모함과 포퓰리즘에도 이번 4·7 재보궐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압승했습니다. 2030의 표가 떼 지어 야권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명박근혜와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그들 입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문 대통령이 '적폐청산'을 말하자 2030세대는 '또 적폐 치트키(게임용어, 게임 종료시키는 만능 명령어) 꺼내 들었네' 코러스하고 비하했습니다. 현 집권세력의 마법의 주문이었던 '적폐와 개혁'은 적어도 2030세대에게 조소(嘲笑)거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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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차가 대구에 진입하고 있다. "자신은 잘못이 절대 없고 남에겐 가혹하고 잔인하며 분열과 편 가르기, 무책임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힌 문 정권에 분노하는 2030세대, 그 잃어버린 꿈과 미래를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약소국으로 끊어질듯 말듯 하면서 나라를 이어 온 것은 우리만의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원효 화쟁사상, 관창 김유신의 화랑정신, 고려의 삼별초 정신, 조선의 사육신, 이순신·논개의 정신. 일제하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이분들의 홍살문과 충효 정신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변화와 창조적인 상상력을 잃어버린 아스팔트 보수층도 같이 청산해야 할 정치의 블랙홀입니다. 이제 한국 정치는 새로운 인물로 새판을 짜야 합니다. 그리고 선순위로 정리할 썩은 정치인은 (1)논문 표절자 (2)코로나 사태에도 혈세로 외국 연수 간자 (3)상습 음주 운전과 과태료 체납으로 압류 당한 자 (4)상대방을 흑색선전으로 모함하는 자 (5)성범죄자와 전과자 (6)국민 위에 군림하며 과도한 증세로 목줄을 조이는 자 (7)절차와 전문가의 정책 평가 없이 정책결정을 하는 자 (8)국민혈세로 추진하는 지역정책을 자기 공으로 포장하는 자 (9)편 가르기 내로남불로 공정정의를 파괴하는 자 (10)무능력, 무책임한 자를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어느덧 승용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집으로 걷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가인 김병로 선생의 정신이 나라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자유민주주의가 튼튼히 뿌리내려 공정과 복지가 상생(相生)하는 사람 사는 맛이 나는 세상이 꼭 올 것이라고 기원해 본다.

글·사진= 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문의 : 순창군청 (063)650-1114

☞내비 주소 : 김병로 생가터(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길 160)

☞트레킹 코스 : 김병로 생가터와 선산 5곳.

☞인근 볼거리 : 강천산 군립공원, 체계산, 국립 회문산 자연휴양림, 내장산, 죽녹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소쇄원, 담양 관방제림, 메타 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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