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동구 효목동 망원공원에 있는 곽재우 장군의 기상을 드러낸 동상. |
1552년 경남 의령군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영특해 학문을 닦으면서도 천문·지리·병서를 섭렵하며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도 연마, 문무를 겸비한 헌헌대장부였다고 한다. 영남 사림의 거목 남명 조식 선생의 외손서(外孫壻)였든 그는 남명 선생의 학풍을 영향 받아 불의와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경(敬)과 의(義)를 행하는 실천적 학문에 충실했다고 망우당문집에 기록돼 있다.
장군의 충절을 기린 예연서원 현판 글씨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썼다. |
이 요체(要諦)는 자아(自我)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실천하며 절대적 공동체인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유교적 가치관과 그의 애국심을 엿볼수 있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신분에 걸맞는 도덕적 책무를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투철한 윤리의식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해 왜군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 그해 5월 초 기강(岐江)전투 승리를 기점으로 5월 말 왜군의 낙동강 도하작전을 저지시킨 정암진 대첩을 비롯해 수많은 전장에서 빼어난 지략과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어 진주성대첩에도 김시민 장군을 도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높은 벼슬을 제수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대나무로 만든 갓)를 만들어 팔며 생업을 이어가는 청빈한 삶을 영위했다고 한다.
장군의 유언에 따라 평장으로 안치된 묘소. 정부인 상산김씨와 합사. |
글·사진= 이외식 시민기자 2whys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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