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의 제3의 눈] 국경 단상, '탄케들'의 일생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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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6-18   |  발행일 2021-06-18 제22면   |  수정 2021-06-18 07:18
33년전 버마학생민주전선처럼
소수민족해방구 운집 젊은이
代이어 민주혁명 외치며 산화
경외심으로 숱한 탄케들 기록
그들 어머니 품 안길 날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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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 전문기자

짙은 먹구름이 몰고 온 장대비가 버마-타이 국경 산악을 때린다. 장마철에 접어든 소수민족 해방구는 서서히 고립되어 간다. 지난 2월1일 쿠데타로 버마 정국이 뒤집혔으니 넉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그사이 유혈진압으로 1천명 가까운 시민이 살해당했고, 숱한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자 국경 소수민족해방군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반군부 정치인들이 지하에서 조직한 민족통합정부(NUG)는 민중방위대(PDF)를 띄워 무장투쟁을 선포했다. 60년째 이어온 세계 최장기 군인독재는 나날이 거칠고 드세질 뿐 누그러질 낌새마저 없다.

여기서 되풀이하는 고단한 버마 현대사를 본다. 33년 전 이맘때였다. 1988년 민주항쟁을 이끈 학생들이 학살 진압과 체포령에 쫓겨 타이, 중국, 인디아와 국경을 맞댄 소수민족 해방구로 빠져나왔다. 그해 11월 학생들은 까렌민족해방군(KNLA) 꼬무라 기지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깃발을 올렸다. 그로부터 학생군은 소수민족해방군들로부터 목숨 건 시험을 당한 끝에 총을 얻었고 머잖아 어엿한 버마민주동맹(DAB) 일원으로 반독재 민주혁명전선을 갔다. 그 학생들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외진 국경에 꽃다운 청춘을 바쳤고, 그사이 1천명이나 웃도는 이들이 민주혁명을 외치며 산화했다.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다. 이 국경 혁명전선을 결코 신세대 젊은이들한테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투쟁도 희생도 우리가 마지막이다."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케(Than Khe) 얼굴엔 외로움이 묻어난다. 정치에 버림받고 역사에 외면당한 덧없는 세월 33년, 그 학생군을 국경에 남겨둔 채 2021년 버마 정국은 또 신세대 젊은이들이 총을 들도록 다그친다. 버마 현대사는 대를 이어 젊은이들한테 너무 가혹한 명령을 내리는지도 모르겠다.

"국경전선은 내 팔자다. 후회 따윈 없다." 33년 전 체포령에 쫓겨 파리한 얼굴로 낯선 국경 땅을 밟은 탄케는 버마 전역 고등학교를 통틀어 1~480등까지 날고 긴다는 아이들이 자동으로 가는 만달레이 의과대학 출신이다. 다른 말로 버마 사회에서 가장 안락하고 풍족한 삶이 보장된 인생이었다. 사실은 탄케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학생군 하나하나는 저마다 보장된 앞날을 지푸라기처럼 버리고 민주혁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져갔다. 바로 욕망 버린 수도자 모습으로 버마 현대사의 명령을 쫓아온 전사들이다.

"반독재 무장투쟁은 가문의 영광이다." 버마에서 이름난 싸움꾼 집안 출신인 탄케의 자부심은 끝이 없다. 아버지 수윈마웅은 1962년 네윈 독재타도운동을 이끈 주인공으로, 88년 민주항쟁 끝에 30년 형을 받았고, 형 탄독은 88년 민주항쟁 도화선을 깐 랭군공대 시위를 이끈 뒤 국경 혁명전선을 거쳐 현재 망명 버마노동조합기구(BLSO) 의장으로 일한다. 남편과 아들 둘을 민주혁명에 바친 어머니 먀탄은 만달레이 운동가를 보살피는 대모 노릇을 해왔다. 오직 하나, 명예를 먹고 산 버마 현대사의 전사들이다.

"군인 독재자가 살아있는 한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린 끝까지 싸운다." 그동안 나는 버마 국경전선을 취재하면서 숱한 '탄케들' 하나하나를 경외심으로 기록했다. 그 '탄케들'이 총을 내리고 고향으로 되돌아가 어머니 품에 안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속절없는 세월이 33년이나 흘렀다. 짙은 먹구름이 버마를 뒤덮어간다. 가녀린 희망의 빛마저 사라졌다. 아직은 '탄케들'이 총을 내릴 수 없는 까닭이다. 새로운 '탄케들'이 총을 드는 까닭이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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