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빵은 대구'로 보는 대구빵의 어제와 오늘 (2)...제빵계 주름잡던 3인방, 80년대 갑자기 사라진 까닭은?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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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02   |  발행일 2021-07-02 제34면   |  수정 2021-07-0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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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직전 삼송빵집을 기사회생 시킨 마약빵.

고사 직전 '마약빵'으로 부활한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삼송빵집. 광복 직후 서모 사장이 세운 삼송빵집의 상호를 계승했다. 지금은 '삼송'이란 상호가 하나밖에 없지만 20년 전만 해도 서구 등 변두리에 몇 개 있었다. 삼송이 그만큼 유명한 탓이었다. 삼송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뀐다. 중구 공평동 스텔라 베이커리 김호상 사장, 옛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도 삼송 간판을 걸기도 했다. 삼송은 1960년대 중반 대형 화재를 당한다. 이 화재는 1973년 6월6일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화재와 함께 대구의 대표적 빵집 화제로 기록된다. 삼송은 신축된 뒤 종업원이 한 번 맡았다가 1973년쯤 역시 삼송의 기술자였던 박명호·정옥희씨 부부한테 넘어온다. 이들이 삼송의 마지막 사장이 된다. 박 사장은 '탈(脫)대신동'을 결심하고 1987년 2월 제일극장 맞은편으로 이전한다. 하지만 대구도시철도 1호선 공사, 그리고 파리바게트의 공세에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 날 대반전이 일어난다. '마약빵 신드롬'이 발생한 것. 친구 사이인 밀밭베이커리(1982년 개업) 이정부 사장이 아이디어를 건넸고 그걸 토대로 대박을 친다. 밀밭도 특허권을 가진 '메론빵'으로 대구빵의 위력을 더욱 증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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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태 단팥빵과 함께 단팥빵 붐을 일으킨 약전골목 입구에 있는 근대골목단팥빵.


두개의 고려당
대구 최초 윈도 베이커리 연 하경봉
63년 月 전화통화 수 1천여통 '핫플'
잘 나가다 빗나간 풍류 행각에 몰락
마요네즈 식빵으로 유명한 강대건
향촌동 고려당 열고 우레볼 선보여

◆고려당을 아시나요

대구 고려당은 두 라인이 있었다. 선두주자는 하경봉, 후발주자는 강대건. 하경봉 고려당은 1955년 중구 화전동 옛 대구극장 입구 오른편 모퉁이에서 개점된다. '대구 첫 윈도 베이커리'로도 평가된다. 1963년 2월22일 영남일보에 소개된 고려당 전경 사진을 본다. 철봉으로 만든 출입문 손잡이가 눈길을 끈다. 경영은 아내 이민두가 전담한다. 경남 의령 출신인 그녀는 광복 직후 대구로 와 중구 봉산동에서 살다가 고려당을 경영한다. 분위기를 위해 저출력 전축도 갖추었다. LP판을 바꿔주는 '판돌이'까지 있었다. 1963년 2월 고려당 전화통화 수는 무려 1천484통, 대구시 접객업소 중 최다 통화수였다. 하지만 주인 하씨의 '빗나간 풍류 행각'으로 인해 고려당은 몰락(1969년)한다. 아내가 1970년 대구를 떠나 서울 명동에서 명성을 재현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강대건의 고려당도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수성구 수성동2가 수성시장 남측 길 모퉁이에 있었던 고려당. 상당수 지역민은 1969년 사라진 하경봉 고려당으로 착각한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강대건은 18세부터 빵과 인연을 맺어왔다. 광복 직후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부산시 보수동1가 백천당에서 제빵 기술을 배웠다. 이후 한일극장 맞은편 뉴욕제과 강신영 사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는 뉴욕제과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는다. 다른 집에선 선보이지 않았던 '마요네즈 식빵'도 개발한다. 고려당이 사라진 뒤 뉴욕제과는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그는 고려당 사장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1972년쯤 향촌동 초입 상업은행 대구지점 북측에 '강대건 고려당'이 등장한다. 히트작은 껍질을 벗긴 팥을 앙금처럼 응고시켜 구운 밤처럼 생긴 '우레볼'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버티지 못하고 도심을 벗어나 1994년 수성시장 근처로 이전하지만 이내 문 닫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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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리에 모인 3인의 대구빵 산증인, 좌로부터 최가네 케이크의 최무갑, 풍차베이커리의 권영오, 공주당 시대를 이끈 윤문식


소리없이 사라진 3인방
사라다빵으로 대박났던 뉴욕제과
즉석 제빵 시스템 도입한 황제당
하절기 빙설 선보였던 런던제과
제빵계 주름잡다 80년대 문닫아
수익감소·정치압력…뒷말 무성


◆대구빵의 골드러시

1970년대 대구 제빵계를 주름잡던 3인방이 있었다. 바로 뉴욕의 강신영·이점석, 뉴델의 최종수, 런던의 조원길 사장이다. 그땐 여건이 좋았다. 섬유경기가 호황이었고 패스트푸드가 대구에 본격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동시장 초입 오른쪽 모퉁이 보래옥을 인수한 강신영은 '뉴욕제과'로 상호를 바꿨고 훗날 한일극장 근처로 이전해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성공시킨다. 강 사장은 1970년대 대구 상권이 남동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일극장 근처로 자릴 옮긴다. 강 사장은 직원 복이 많았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모닝식빵을 개발한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사장 권영오, 수성구 시지에서 뉴욕제과를 오픈한 김정환, 고려당 베이커리 사장 강대건 등이 그곳을 거쳤고, 그때마다 신제품을 개발해줬다. 그런 연유로 뉴욕의 '사라다빵'이 불티나게 팔린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뉴욕은 도중하차하고 옛 동원예식장 지하 동원제과점을 운영한 상주 출신의 이점석(전 대구경북제과협회 지회장)이 뉴욕을 인수해 더욱 발전시킨다. 뉴욕의 아성에 도전한 게 바로 옛 송죽극장 동편에 있었던 '뉴델제과'. 최종수는 처음엔 과자 도매점도 하면서 기반을 다진다. 그는 런던제과와 뉴욕제과 사이에서 고사 직전이던 킹뉴델을 '황제당'으로 상호를 바꾸어 런던과 팽팽한 접전을 펼친다. 황제당 '즉석 제빵 시스템'은 이후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켰고 후에 지역 제빵사들은 너도나도 그 모델을 도입하게 된다.1970년대 초 동성로 동아백화점 네거리 근처에 있었던 옛 원호청 자리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진 제과점이 들어온다. 바로 '런던제과'였다. 특히 하절기엔 빙설이 강했다.

하지만 뉴욕·뉴델·런던은 전두환 정권 말기쯤 갑자기 사라진다. 3인방은 나름대로 부동산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제빵 영업이 갈수록 마진율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가가치세(1977년 도입)로 인해 수익률까지 날로 감소했다. 19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각종 패스트푸드가 대구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제빵산업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안 것이다. 또한 지역자본가로 성장한 그들을 겨냥한 정부 당국의 정치자금 압력도 달갑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특수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문을 닫아버린다. 그 흐름을 역이용한 게 '공주당'이다. 성주군 월항면 출신으로 맨손으로 대구로 와 공주당 브랜드를 만든 박건서 사장. 그는 1970년대 초 동아백화점 맞은편 석탑베이커리 옆 골목에서 허름한 간판의 도넛 전문점을 차렸다. 공주당은 1997년 박 사장의 조카 찬홍씨가 인수해 명맥을 이었고 10년 전부터 시내 여러 카페에 빵을 납품하면서 저변을 확대했다.

◆오복빵

북구 침산동 1015번지, 3산단에 자리 잡은 오복빵은 오복건빵과 함께 1970년대 구멍가게를 주름잡았던 인기 브랜드. 그때 대구의 대량 생산업체로는 수형당이 선두였고 오복빵이 그 뒤를 따랐다. 광복과 함께 서울 을지로에서 태어난 삼립도 1970년쯤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북구 칠성동1가에 대구센터를 설립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오복빵이 선두권이었지만 결국 부산에서 생겨난 <주>기린한테 1979년쯤 잡아 먹힌다. 1982년 기린 산하에 '밀탑사업부'가 생긴다. 파리바게뜨가 등장하기 전 10여 년 밀탑은 대구시장을 공략하기 쉬웠다. 전국에선 처음으로 셀프서비스란 걸 도입한다. 그 전만 해도 직원이 빵을 골라줬는데 밀탑은 손님이 직접 고르도록 했다. 인기 절정이었던 밀탑도 2002년 대구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기억해야 할 빵집들
전국 첫 셀프서비스 도입한 밀탑
일본식 제빵 문화 뒤집은 스텔라
동아백화점 옆 도넛 맛집 공주당
삼송의 마약빵과 밀밭의 메론빵
대구가 사랑한 '잊을 수 없는 맛'


◆기억하자 스텔라베이커리

1980~90년대 초 대구 사람치고 대구 중구 공평동 '스텔라 제과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광복 직후 형성된 일본식 제과제빵 문화를 대구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 제과점 중 하나가 바로 스텔라다. 김호상(본명 김태성) 사장은 아직도 대구 제빵인에겐 입지전적 인물로 추앙받는다. 안동 출신의 김 사장은 '빵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기술은 대구에 머물지 않았다. 국제적이었다. 사업은 '희극'이었지만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1990년대 말 어느 날 밤, 김 사장 내외가 자신의 아파트에 침입한 괴한에게 피살된 것이다. 이후 대구빵은 침체기를 거쳐 서구 동네 맛빵 시대를 딛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케이크전문점(최가네케이크) 등이 베이커리카페 시대를 개척한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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