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경주 국보탑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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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09   |  발행일 2021-07-09 제35면   |  수정 2021-07-09 08:54
國寶9탑 중 6기가 절터에 홀로 남아 역사·전설 이야기하는 폐사지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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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30호 분황사 모전석탑.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범어 '스투파'에서 유래했다. 재료에 따라 석탑·목탑·전탑으로 나누는데 현재 1천200여 기가 남아 있다. 그중 국보로 지정된 탑이 31기이며 9기가 경주에 있다. 경주를 재미있게 여행하는 방법은 이 국보탑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이다. 국보는 우리문화의 정수로 오천년 역사유물 가운데 335개만 지정됐고 일반문화재와 격이 다르다. 경주 국보9탑 답사를 마치면 탑에 대한 안목과 인식이 분명 달라진다.

경주 국보탑을 다니기 좋게 서에서 동으로 살펴보면 서경주 나원리의 국보39호 나원백탑, 안강 옥산서원 옆 국보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 시내 구황동 국보30호 분황사 모전석탑, 그 옆 낭산 동북기슭 국보37호 황복사지 3층석탑, 박물관 앞뜰에 국보38호 고선사지 3층석탑, 불국사 경내 국보20호 다보탑과 21호 석가탑, 토함산 동편기슭에 국보235호 장항리 서5층석탑, 동해바닷가 국보112호 감은사지 3층석탑이다.

◆탑의 층은 홀수

탑은 3층·5층·7층탑처럼 홀수 층으로 돼 있다. 홀수는 동양사상에서 유래됐다. 고래로부터 홀은 짝보다 우위였고 선호했으며 전통명절 새해(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 중양절(9.9)이 모두 겹홀수일이다. 초가도 3칸, 밥상도 7첩반상, 음양오행까지. 홀수문화는 우리생활 깊숙이 들어왔고 홀수 탑도 그런 연유다. 짝수 층탑으로 경천사지와 원각사지 10층탑이 있는데 10이란 숫자는 십진법에서 근원과 완전함을 의미하며 10층탑은 조형상 3층탑과 7층탑이 합쳐진 모습이다.

탑의 층수는 어떻게 헤아리는가? 탑은 세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쪽 기단부, 위쪽 상륜부, 가운데가 탑신부다. 탑신은 몸돌(층돌)위에 지붕돌을 얹어 놓았는데 그 개수가 층수다. 지붕돌은 '옥개석'이라고 한다.

탑은 절과 함께 세워졌다. 탑이 하나이면 '1금당 1탑 가람'이고, 탑이 두개이면 '1금당 쌍탑 가람'이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여 탑 속의 부처를 따르고 공경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금당은 부처의 형상을 조형으로 표현한 불상을 모신 곳이다. 1금당 1탑 가람은 탑과 금당의 위세가 엇비슷하고 1금당 쌍탑 가람은 금당이 사찰 중심이 되어 좌우에 탑을 세웠고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됐다.


동양사상 유래, 홀수탑 층수로 선호
사찰에 탑이 하나면 '1금당 1탑 가람'
화강암 산지, 내구성 좋은 석탑 발달
아래쪽 2층 기단부, 상승과 안정 조화


◆상승미와 안정감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중국에는 전탑(벽돌탑), 일본에는 목탑이 성행했고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는 자연스레 석탑이 발달했다. 불교 전래 초기에 황룡사 9층탑 같이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법주사 팔상전이 목탑으로 국보탑이고 안동 법흥사지 7층탑이 전탑으로 국보탑이다. 석탑은 내구성이 뛰어나 손재주가 탁월한 우리 조상은 화강암을 흙 다루듯 주물럭거려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탑의 미적 완성은 상승미와 안정감이다. 상승미와 안정감은 서로 배치되는 미감으로 상승미가 살아나면 안정감이 약해지고 안정감을 강조하면 상승미가 죽는다. 하지만 날렵하되 가볍지 않아야 하고 안정감이 있되 둔중하지 않아야 하고 빼어나되 천박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조상은 탑의 상승미를 몸돌의 체감률에서, 안정감을 기단의 튼실함에서 찾았다. 몸돌 체감률을 경쾌하게 함으로써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상승감을 아름답게 나타내고 기단을 2층으로 만들어 둔중함 대신 듬직함으로 상승과 안정을 조화롭게 했다.

멋진 탑은 강함과 부드러움, 우아함과 당당함, 그리고 고고함이 어우러져 있다. 미학적 비례에 시각적 기쁨을 얻고 탑의 역사성과 전설이 담긴 분위기에 무엇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폐사지 탑이 많다. 31기 국보탑 중 22기가 폐사지 탑으로 잦은 외침과 오백년 억불정책으로 금당은 없어지고 탑만 절터에 홀로 남아있다. 경주 국보 9탑도 다보탑·석가탑·분황사탑을 제외하고 나머지 6기가 폐사지 탑이다. 이곳이 한때 부처를 모신 불국토임을 밝히고 산야에 홀로 남아 역사와 전설을 이야기하는 폐사지탑의 모습은 늘 애잔하다.

나원백탑
국보 39호 나원백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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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

◆나원백탑과 정혜사지 13층석탑

나원백탑은 영국 신사 같다. 서경주에서 안강으로 가는 길, 나원리 마을에 있는 석탑으로 경주 물길인 형산강변에 세워진 8세기 신라 번성기 탑으로 추정된다.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어 나원백탑이라 부른다. 몸돌과 4m가 넘는 지붕돌이 한 개 돌로 만들어져 있다. 경주에서 보기 드문 5층탑이다. 처음 보는 순간 '아, 이런 탑이 국보탑'이구나 하고 느껴지는, 듬직한 위엄과 백색 화강암의 맑은 기품에 감탄하게 된다. 벼슬을 내린다면 탑의 대제학이다. 금당으로 추정되는 위치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돋보인다.

정혜사지 13층석탑은 1층 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 몸돌과 지붕돌이 급격히 작아져 마치 2층 이상의 탑신부가 1층 위에 얹어진 머리장식처럼 보이는 이형탑이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정혜사지는 이언적이 젊은 시절 공부한 곳이다. 조선후기 화재로 폐허가 되었고 탑은 옛 모습 그대로 은행나무 고목에 둘러싸인 채 고즈넉하게 홀로 서 있다. 마치 인도공주가 우리나라와 시집와 혼자 남은 모습 같다.


영국신사 같은 순백의 기품 나원백탑
신라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된 분황사탑
통일신라시대 미술 정수 보여준 다보탑
완벽한 아름다움과 비례 갖춘 석가탑
쌍탑가람 최초 모습 감은사지 3층석탑



◆분황사 모전석탑과 황복사지 3층탑

분황사탑은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신라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회흑색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模塼·전탑을 모방한)석탑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현저하게 줄어들어 초기 불적의 수수함과 질박감이 느껴진다. 1층 몸돌 4면에 문이 있고 수호신 인왕상 조각이 아름답다.

분황사 앞의 너른 들판이 황룡사터이고 좌측에 누에고치처럼 생긴 작은 산이 낭산이다. 낭산 동북기슭에 있는 황복사지 3층석탑은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에 세운 탑이다. 탑을 해체·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에서 금동사리함과 금동불상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금동불상 2점이 국보79호와 80호로 지정됐다. 뒤편 낭산 위에 선덕여왕릉이 있고 저 아래 보문들에 왕버들로 둘러싸인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보인다. 최근 수로 따라 길이 만들어져 가기 쉽고 진평왕릉은 괘릉과 함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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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0호 불국사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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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1호 불국사 석가탑.

◆고선사지 3층탑과 다보탑·석가탑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 옛터에 세워져 있던 3층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절터가 수몰되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감은사지탑과 형제처럼 닮았는데 무골장군의 기품이 느껴진다. 마치 신라에 귀화한 고구려 장수가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와 고향을 그리는 듯 상륜부 찰주도 잃어버린 채 홀로 묵묵히 서 있는 모습에 당당함과 애잔함이 겹친다. 비록 폐허가 되었을지언정 내 집을 지키며 서 있어야 돋보이고 주변과 어울려야 제 맛이 나니 탑이 본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까닭을 말해주는 것 같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백여년이 지난 경덕왕(751년) 때 세워졌다. 경덕왕은 석굴암과 불국사를 세운 임금으로 뛰어난 군주다. 다보탑은 화강암을 4각·8각·원의 형태로 다듬어 지붕돌을 특이하게 표현한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천상의 공주 가마가 기단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1925년 일본인이 탑을 해체·보수하였는데 보수 기록과 사리, 사리장치, 유물이 모두 사라지고 계단의 돌사자도 네 마리 중 세 마리가 분실돼 한 마리만 남아있다.

석가탑은 감은사지탑과 고선사지탑을 이어받아 신라석탑으로 최고의 완성미를 이루었다. 정제된 아름다움, 단아한 기품, 완벽한 조화와 균형미를 갖춘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이다. 이후 모든 3층석탑은 석가탑의 아류이고 모방이다. 완벽한 아름다움과 비례미로 범접할 수 없는 미녀 같다. 2층 금동사리함에서 너비 8㎝, 길이 6m 한지두루마리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국보126호가 됐고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내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담겨있어 '무영탑'이라 부른다.

◆장항리 서5층탑과 감은사지 3층탑

장항사지는 토함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터로 최근에 지은 한수원 본사와 가깝다.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일제 때 도굴되어 붕괴된 것을 서쪽 5층탑만 복원하고 동탑은 지붕돌만 포개 놓았으며 1층 몸돌 조각이 아름답다. 경주를 알고 싶거든 에밀레 종소리를 들어보고 장항사지에 가보라고 했건만 폐사지 유적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옛 신라의 1탑가람에서 삼국통일 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 모습이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동해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물리쳐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절로 아들 신문왕이 682년 완공했다. 경주 국보탑으로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절터에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감동적이며 우리나라 석탑을 대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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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감은사지는 저녁 해가 토함산으로 넘어가면 더욱 좋다. 옅은 어둠이 황혼과 함께 다가올 때 동편에서 쌍탑 피사체를 휴대폰에 담으면 자연이 작품사진을 만들어 준다. 탁 트인 배경과 토함산 명암이 탑의 실루엣과 묘하게 연출되어 웅장함과 신비감을 더해 준다. 누가 알랴, 이곳이 경주 최고의 뷰포인트임을.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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