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쓰봉과 바지

  • 장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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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16   |  발행일 2021-07-16 제23면   |  수정 2021-07-16 07:09

박정희 정권 시절 경북도지사를 지냈고 행정관료에 이어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했던 지역 원로정치인 K씨 일화다. 1971년 여름, 폭염이 내습해서 한반도가 용광로가 됐다.

어느 날 자정이 넘은 시각에 K도지사 숙소로 전화가 왔다. 당시엔 비상 전화가 숙소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를 받으니 "임자 뭐 하노. 자는가?"라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각하 전화를 받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이 가뭄 걱정에 밤새워 뒤척이다가 K도지사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K도지사는 한마디 더 했다. "각하 잠시만요. ‘쓰봉 ’입고 다시 전화 받겠습니다"라고 했단다. ‘쓰봉’은 양복바지의 비표준어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얼마나 기특했겠는가. 실제로 바지를 새로 입고 통화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요즘 바지가 화제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컷오프 토론회에서 형수 욕설 건에 대해 고개를 숙였다. 배우 김부선과의 교제설을 묻는 정세균 후보에게 답변 대신 "바지를 내릴까요?"라고 했다. 그것도 웃음기 띤 표정으로. 생중계되는 판국에 국민을 상대로 우롱하는 것이다. 선출직 정치인으로서 태도가 아니다. 바지 벗는 액션은 가황 나훈아면 족하다. 억울하다면 좋아하는 법 놔두고 뭐 하는가. 명예훼손 혐의로 김씨를 고소하면 될 것 아닌가.

추미애 후보는 바지폭과 치마폭 차이를 인용했다. "치마폭이 바지폭보다 넓다"라면서 자신이 편협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백 번 양보해서 직장에서 "바지를 내릴까요?"라거나 "치마폭이 바지폭보다 넓다"라는 말을 했다면 듣기에 따라 성추행에 해당된다. 민주당 컷오프 토론회에서 후보자들이 어떤 정책으로 다퉜는지 기억조차 없다. '바지 타령'만 뇌리에 남았다.

내년 대선은 국정 5년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다. 국민은 이죽거리거나 비아냥대는 정치인들의 태도를 가장 싫어한다. 두고두고 짐이 될 터이다. 참을 수 없는 경박함이 어째 좀 거시기하다.

장용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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