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며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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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06   |  발행일 2021-08-06 제15면   |  수정 2021-08-06 07:43

정만진20201220
정만진 소설가

1953년 8월6일 임화가 죽었다. 1953년 8월6일이면 한반도를 휩쓴 전쟁이 휴전으로 사실상 종전되는 7월27일보다 불과 열흘 뒤다. 하지만 임화가 자연사를 한 것으로 지레짐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미제 스파이'로 몰려 사형되었다.

'죽었다'는 표현도 그런 함의를 바탕에 깐 의도적 어휘 선택의 소산이다. 우리 문화는 종종 사대주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언어생활도 그런 면모가 강하다. 예술은 'Nude', 보통은 '裸體', 수준 이하는 '알몸'이라 하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죽었다'는 '타계'와 '별세'는 물론 '사망'보다도 한 수 아래다.

임화는 이른바 월북문인이다. 3·8선을 넘어가기 전에는 카프(KAPF) 활동을 했다. 계급주의 문학, 즉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창작했다는 뜻이다. 그는 카프 중 최고의 시인이자 평론가였다. 월북한 1947년 이전 창작시 중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것은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등이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와 화로'는 1929년 22세의 임화가 썼다. 제목에 오빠가 등장하는 시에는 12세 최순애의 1925년 발표작 '오빠 생각'도 있다.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경향이 판이하지만 오빠가 집에 없다는 점은 두 시가 같다. 한 오빠는 감옥에 갔고 다른 오빠는 서울에 간 점이 다르다. 물론 서울에 간 오빠도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탓에 비단구두를 들고 누이동생에게 올 수 없는 형편인지 모른다.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한 최순애의 오빠 최영주는 어디로 갔을까.

최영주는 잡지 '어린이'의 편집을 담당했다. 당시 너무나 바빠 수원 집에 잘 들르지 못한 것은 사실로 알려진다. 어린 최순애로서는 한 달에 한 번쯤 보는 오빠가 집에 오지 않는 듯 느껴졌을 법도 하다. 독립 직전 최영주는 친일로 돌아섰다. 화로는 깨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지조를 지켰더라면 누이의 '오빠 생각'이 더욱 불후의 명작으로 기려졌을 텐데 안타깝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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