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학교를 가만히 거닐기

  • 김언동 경북대 사범대 부설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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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27 07:46  |  수정 2021-09-27 08:17  |  발행일 2021-09-27 제12면

김언동
김언동 〈경북대 사범대 부설고 교사〉

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그의 단편 소설 '산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로 앞에 풍요로운 대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나는 가장 작고 가장 허름한 것만을 주시했다. 지극한 사랑의 몸짓으로 하늘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발저는 산책에 강박적으로 몰두했습니다. 그에게 산책은 자신의 내면을 거니는 행위였고 이는 곧 글의 소재와 형식이 되었습니다. 심상, 스케치, 우화, 단편 같은 형식 속에서 발저의 인물들은 대부분 무기력한 보통의 소시민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권력과 지배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가난하고 초라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고자 애씁니다. 발저는 작품 속에서 고립되고 무력하지만 자유로운 자신의 작은 세계를 지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냅니다.

5일간의 추석 연휴. 아마도 저희 가족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이었다면 여행을 떠났을 것입니다. 몇 년 전부터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거든요. 올해는 여러 사정상 집에서 식구들끼리만 보내기로 했습니다. 집 주변을 산책하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농산물 직거래 장터에 가서 작물을 키운 농부의 이름을 당당하게 달고 있는 채소와 과일을 구경했습니다. 추석 전날에는 명절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동네에 하나뿐인 떡집에 가서 송편을 샀습니다. 동네를 걸으며 이제 밤마실에는 가벼운 점퍼를 꼭 걸쳐야 할 만큼 가을이 무르익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산책으로 연휴를 채웠습니다.

플라뇌르. 산책자를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 거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를 이리저리 한가로이 걸으며 도시를 관찰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에서 중요한 일로 여겨져 왔다고 합니다. 다른 언어에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산책자의 의미를 해석한 경우가 없는 듯합니다. 여유가 없는, 다시 말해 여유가 생기면 불안함을 느끼는 현대 사회에서 산책자의 경험은 그만큼 소중합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드 세르토는 '걷는 것은 삶을 주체화하는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걷는다는 건 별 의미없는 본능적인 행위처럼 보여도 사실은 아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인 것이죠.

마침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책 '내 방 여행하는 법'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재밌습니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금지된 결투를 벌였다가 42일간 가택 연금형을 받은 작가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기만의 집안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여행을 적은 기록을 형에게 읽어달라고 보냈는데 형이 그의 글을 익명으로 출간하여 세상에 나옵니다. 이 책은 여행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습니다. 몇 평 안 되는 좁고 별것 없는 내 방 안에서도 여행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여행이야말로 새롭고 낯선 것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발견'함으로써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새롭고 낯설게 보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이 '여행'을 어떤 방식으로 해냈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산책하면서 찬찬히 살펴본 적은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자신있게 잘 알고 있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듯, 내가 사는 동네도 잘 모릅니다. 학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아이들이 하루의 절반을 머무는 학교입니다. 학교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아이들이 플라뇌르가 되어 그 공간을 관찰하도록 돕고 싶은 가을입니다. 김언동 〈경북대 사범대 부설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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