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2021 세대공감 공모전' 大賞 성백광 강북고 교사 수기

  • 성백광 강북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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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04 07:54  |  수정 2021-10-04 08:03  |  발행일 2021-10-04 제13면
아내는 속상한 일 내색 않고 언제나 빵싯 웃어
갑작스러운 한집 생활 당황했지만
부모님 큰방 마다하며 며느리 배려
손주와 장기 둘땐 일부러 져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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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백광(뒷줄 가운데) 교사 가족이 설날 차례를 마치고 가족 사진을 찍고 있다. 〈성백광 교사 제공〉

최근 나는 부모님이 오랜 세월 살았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살아생전에 부모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구중중한 텅 빈 시골 촌집을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생전에 손수 만들어 놓으신 낡은 아래채 담장으로 붙어있는 좁다란 텃밭에다 평소 아버지가 일구시던 방식 그대로 자질구레한 채소들을 심었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돌아가시기 반년 전쯤에 있었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라 운전 중에 아내 몰래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난 일찍 퇴근했다. 얼마 뒤 아버지가 잠긴 현관문을 방싯 열고 들어오셨다. 당시 아버지 손에는 손잡이가 유독 몽똑하니 짧달만하고 몸통마저도 손거울만큼이나 잗다란 게 아무리 봐도 볼품없는 프라이팬이 하나 댕그라니 들려 있었다. 그런데 겉으로는 신기하게도 매끄럽고 빤지레하게 윤기가 났다.

"아버지 이게 웬 프라이팬이에요?"

그러자 아버지는 둥그스름하게 우묵한 눈을 연신 끔벅거리시다가 되똑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 일도 아이다. 그냥 너거 프라이팬이 하도 낡고 기름때가 잔뜩 끼어서 이참에 너거들 프라이팬 몽땅 고물상에다 팔고 새것 하나 샀다"라며 마치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일을 해냈다는 듯이 뿌듯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셨다. 그때 아내가 퇴근해 집에 왔다. 내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아내에게 얘기하자 아내는 잠시 머쓱해 하다가 금방 아버지를 향해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이고는 말했다.

"우와! 정말 예쁘네요. 고마워요. 잘 쓸 게요. 아버님!"

아내는 프라이팬을 얼른 받아들고는 요리조리 살피다가 쑬쑬하니 괜찮다는 듯이 한동안 혼자서 재재바르게 웃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아내는 나에게 미끄러지듯 쪼르륵 달려와 목소리를 완전히 죽여 가며 조용히 말했다. "사실 아버님께서 방금 고물상에다 파신 프라이팬 중에는 바로 몇 달 전에 비싸게 주고 산 새것도 있어서 좀 아깝긴 한데 아버님이 사다 주신 프라이팬도 나쁘지 않네"라며 잠시 울상을 짓다가도 이내 밝은 표정을 보였다.

이처럼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한다고 하시는 일이 간혹 아내의 생각과 정반대로 소소하게 일을 그르치시는 아버지에 대해 아내는 여태 못마땅하다고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부모님으로 인해 속상한 일이 있어도 그저 소리 없이 언제나 빵싯 웃어주는 아내가 난 너무도 고맙다.

4대째 외동이었던 나는 부모님의 결혼 재촉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가진 아내와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결혼 일년 만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아직은 농사일에 힘이 들 만큼 연세가 그리 많지 않으셨기에 우리와 함께 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계셨다. 그래서 첫째 큰딸 아이는 전혀 일면식도 없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 손에 키워졌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둘째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그 길로 바로 우리와 함께 살겠다고 보따리 싸서 찾아오셨다. 이로써 당시 육십대 후반이었던 부모님은 졸지에 주말부부가 되고 말았다. 부모님께서 주말부부로 생활하신 지 7년이 지났을 무렵 아버지께서 농사일에 힘이 부치셨는지 논밭에 추수를 끝낸 늦가을쯤 농사일을 전부 접으시고 그해 우리 곁으로 오셨다. 이후 3대가 조막한 아파트에서 함께 지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기에는 둘 모두가 불편했다. 이는 세대를 넘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함께 공감하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과거 아버지는 여름 농사철이면 더위 때문에 웃통을 훌러덩 벗어 던지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두 아이가 버릇없이 굴면 버럭 하고 큰소리로 꾸짖던 아내는 시부모님의 손주 사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자니 화딱지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음에도 참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여태껏 바쁜 아침 식사 준비는 늘 어머니 몫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녁 식사만큼은 일주일에 두세 번꼴로 배달 음식 아니면 바깥에서 외식하는 게 서로에게 훨씬 더 편안하고 이득이라는 사실에 가족 모두가 공감했다. 아버지는 처음과 달리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집밥보다는 바깥 음식이 훨씬 더 맛있다"라며 선의의 거짓말을 하시면서 며느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내 눈에 훤히 다 보였다.

십여 년 전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도 우리 곁에 오시던 날 아내는 몹시 당황했다. 우선 큰 안방을 부모님께 드려야 할지 아니면 식구가 조금 더 많은 우리가 큰방을 써야 할지 난감해했다. 이를 직감하듯 아버지께서는 두말하지 않고 단박에 "내가 살던 시골 촌집에 비하면 저기 끝 방은 대궐이나 마찬가지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너희가 햇볕 잘 들어오는 넓은 안방을 쓰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막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유별나게 장기를 잘 두었다. 아마도 할아버지를 따라 자주 노인장에 가서 할아버지 친구 분들과 장기를 둔 게 분명하다. 아버지 장례 기간에 막내 아이가 나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 할아버지 친구분들과 장기를 두지 못해 실력이 늘지 않을 것 같다"며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다. 아버지의 장기 실력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모두 인정하는 실력이다. 그래서일까 막내 아이는 할아버지 영결식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진짜로 정정당당히 장기를 두어 꼭 한 번 이겨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동안 아버지는 손자와 장기를 둘 때마다 줄곧 일부러 실수하는 척 시합에 져주곤 했다. 나도 알고 막내 아이도 알았지만, 아버지는 괜히 '허허'하고 헛웃음 치시며 마치 당신이 실력에 의해 손주에게 패한 것처럼 연출하시곤 했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 시골집 사랑방에서 두 무릎을 반듯하게 꿇고 자주 바둑을 두었는데 유독 나만 할아버지에게 패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이유를 그때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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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백광 강북고 교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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