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상례·만가·만시 "어린 자식 남겨두고 어디를 갔나…" 애통한 마음 담은 '마지막 인사'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 |
  • 입력 2021-10-08   |  발행일 2021-10-08 제35면   |  수정 2021-10-08 08:28

5퇴계
예로부터 글을 사랑한 선비는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나면 글을 지어 망자를 기렸는데 이를 '만시(挽詩)' 또는 '만사(挽詞)'라 했다. 만시는 무덤 속에 묻거나 만장으로 만들었다. 만시의 만(挽)은 '상여를 끈다'는 뜻이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청송 진보면 추현리 상두소리 재현 행사. 〈문화재청 제공〉

조선은 예법의 나라였다. 왕실에는 왕가의 5가지 기본의례를 만들어 '국조오례'라 했고 사대부를 비롯한 백성들에게는 '가례(家禮)'를 만들어 지키도록 했다. 가례란 사람의 일생 중 관혼상제(성인식·혼인·장례·제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이때 지켜야 할 예법을 말하는데 상례가 가장 까다롭고 복잡했다.

우리나라 가례는 주희의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만들었고 선조 때 김장생이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 보완해 엮은 책이 '가례집람'이다. 가례집람은 총론 1권, 각론이 9권인데 관례·혼례·제례가 각 1권이고 상례가 6권이다. 이처럼 인간사에서 상례 비중이 가장 컸고 엄격했으며 지킬 것도 많았다. 당쟁의 빌미가 된 예송논쟁도 상례 다툼이었고 상·제례 예법 속에 조선 오백년은 갇혀 있었다.

예법의 나라 조선
관혼상제 중 상례가 가장 중요
형식 중요시…당쟁 빌미 되기도
글 지어 망자 기리는 만시·만사
무덤 속에 묻거나 만장 만들어
상사에 부르던 구전민요 만가
생사 경계 넘어 '영혼의 교감'

◆상례 만시(挽詩)

실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예법이 조선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은 주희의 영향이 컸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예(禮)를 하늘의 이치가 절도에 맞게 드러난 것으로 인간사에서 본받아야 할 규범'이라고 했다. 주자학에 경도돼 다른 의견을 이단시 한 조선사회는 예법에 몰입하게 되고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예법을 학문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예학이라 했고 예학은 성리학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의약·농잠 등 실학보다 우위였고 예법을 알아야 선비 대접을 받았으며 많은 학자가 앞다퉈 예법 책을 썼다. 가문마다 예서를 만들어 가풍을 세우고 중히 여겼건만 시대의 물결 속에 옛 가례는 아침이슬처럼 사라졌다.

예로부터 글을 사랑한 선비는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나면 글을 지어 망자를 기렸는데 이를 '만시(挽詩)' 또는 '만사(挽詞)'라 했다. 만시는 무덤 속에 묻거나 만장으로 만들었다. 만시의 만(挽)은 '상여를 끈다'는 뜻이다. 만시의 기원은 신라시대 스님 월명사가 누이의 죽음을 기리면서 지은 향가 제망매가다. 고려·조선의 내로라하는 선비는 물론 규방여인, 중인, 글을 아는 노비 등도 만시를 지었다. 시묘, 소상, 탈상 같은 상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만시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명주실 같았고 영혼의 교감이었다.

북망산이 멀다더니 앞동산이 북망산일세
어딜갔나 어딜갔나
호호백발 부모님과 어린 자식 남겨두고
어디를 갔나
(하략)
-청송 추현 상두소리-

지난해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올해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무덤 둘이 마주보고 솟았네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 불고
귀신불이 숲속에서 깜박인다
지전을 태워 너의 넋을 부르고
맑은 물을 네 무덤에 뿌린다
(하략)
-허난설헌이 쓴 哭子-

어쩌면 저승의 월로에게 애원하여
내세에는 그대와 나의 처지를 바꿔 태어나
나 죽고 그대 혼자 천리 밖에 살아남는다면
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련마는
(하략)
-추사가 쓴 悼亡-


4퇴계
망자를 땅에 묻은 후 무덤가에는 석물을 만들고 망자의 일생을 적은 비석을 세웠다. 경주 괘릉 석물.

◆만가(挽歌)와 석물

상사에 부르던 구전 민요를 만가라 하여 전통 소리문화로 보존하고 있는데 상여소리와 달구질소리가 그것이다. 상여소리는 상여를 멘 상두꾼이 부르는 노랫소리로 하도 구성져 '애소리'라 했으며 청송 진보의 추현 상두소리는 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북망산이 멀다더니 앞동산이 북망산일세, 어딜갔나 어딜갔나 호호백발 부모님과 어린 자식 남겨두고 어디를 갔나…'

망자를 땅에 묻고 흙과 회로 다지고 잔디 띠를 입혀 봉분을 만들면서 부르는 만가가 '달구질소리' 또는 '회다지소리'다. 선소리꾼이 앞소리를 매기면 달구꾼들이 뒷소리를 받으며 막대기로 땅을 다지고 발로 밟고 빙빙돌면서 매기고 받는 소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영혼과의 대화이다.

무덤가에도 다양한 석물을 만들었다. 망주석을 세워 여기가 고인의 안식처로 신성한 곳임을 알렸고 죽은 이의 일생을 적은 비석을 세웠다. 장명등을 만들어 불을 밝혔고 문인상으로 망자를 보필했으며 무인상으로 망자를 지켰다. 수호석수는 돌사자나 돌호랑이에서 점차 돌양으로 바뀌었다. 양의 순한 모습이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봉분 곁에는 동자석을 세워 살아생전처럼 망자 가까이서 시중들게 했다. 석주를 세우지 못하는 가난한 백성은 망주석과 형태가 비슷한 노간주나무를 심어 대신했고, 백일 동안 피어있는 붉은 꽃이 악귀 침범을 막아준다는 주술적 신앙으로 배롱나무를 심기도 했다.

무덤 안에는 저승길이 외롭지 않도록 생전에 입었던 옷, 아꼈던 문방사우, 금은 장식이나 옥구슬, 도자기 등 진귀한 물건을 만시와 함께 묻었고 저승길 편히 가라고 지전을 태워 노잣돈을 챙겨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장품은 진귀하고 값이 많이 나가 도굴은 역사보다 오래됐고 도굴범은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죄인 중 하나라고 한다.

◆율곡이 쓴 퇴계 만시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황해도 석담에 머물고 있던 율곡은 부음을 듣고 만시를 지어 애도했다. '남쪽 하늘 아득히 영남 땅에 저승과 이승으로 갈라놓았으니 서해 바닷가 이 몸은 눈물이 마르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고 애통했다. 훗날 제자들에 의해 조선 지식인 사회가 두 쪽으로 쪼개져 우리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명경지수처럼 맑았다.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의고 불가에 귀의하는 등 방황하다가 성주목사 노경린 집안으로 장가들었고 22세 되던 1558년 초봄에 장인 임지인 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면서 예안으로 퇴계를 찾아간다. 대사성을 마치고 도산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있던 퇴계는 이때 찾아온, 35세 어린 빼어난 젊은이 율곡과 사제의 인연을 맺고 성리학의 가르침과 논변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 모두 이 만남을 글로 남겼는데 퇴계는 '수재(秀才) 이군이 계상을 찾아오다'라고 시를 지었고 율곡은 이때 심정을 훗날 지은 퇴계 제문에서 밝혔는데 스스로를 '소자'라 칭하며 '공부의 길을 잃어 가시밭길을 헤매다가 수레를 돌려 바른 길로 나아감은 스승의 가르침에 크게 힘입었다'고 했고 '스승을 좇아 업을 마치기를 바랐는데 하늘이 붙들어 주지 않는다'고 슬퍼했다. 마침 내린 춘설을 핑계로 율곡은 예정보다 이틀을 더 머물다가 사흘 후 강릉 외가로 떠났고 그해 가을 별시(초시)에 장원을 한다. 퇴계는 큰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 율곡을 '후생가외(後生可畏·젊은 후학이 가히 두렵다)'라 칭찬했다.

3퇴계
만시를 적어 만든 만장 깃발.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허난설헌 '세번의 통곡'
돌림병으로 어린 자식 둘 잃고
"피눈물 나와 슬픔으로 목 메어"
충격에 배 속의 아이도 유산돼
요절한 규방시인, 문집만 남겨

◆허난설헌의 자식 만시, 곡자(哭子)

'지난해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올해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무덤 둘이 마주보고 솟았네.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 불고 귀신불이 숲속에서 깜박인다. 지전을 태워 너의 넋을 부르고 맑은 물을 네 무덤에 뿌린다. 나는 안다네, 남매의 넋이 밤마다 서로 따르며 노니고 있다는 것을. 배 속에 아이가 있다한들 어찌 장성하길 바라겠는가? 헛되이 황대조사(명나라 유명한 애도시)를 읊조리니 피눈물이 나와 슬픔으로 목이 메이네.'

선조 때 8세 여아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 허난설헌이 어린 자식 둘을 돌림병으로 잃고 그 슬픔에 지은 만시다. 죽음은 인간사에서 가장 큰 슬픔이고 자식 잃은 부모아픔이 가장 크다는데 애처롭기 그지없다. 당시 영·유아 사망률이 무척 높아 성장할 때까지 이름 짓지 않고 '태명'으로 불렀다. 난설헌의 두 자식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고 배 속의 아이도 유산했다고 한다.

그녀가 살았던 시기는 임란 전이라 재산상속이 남녀균등이고 처가거주혼이 성행하여 여성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친정아버지가 경상감사를 지낸 허엽으로 명문가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많은 교육을 받고 문학에 천재적 재능을 나타냈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해 27세에 요절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남동생이다.

허균은 요절한 누이의 작품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고, 1606년 명나라 한림원 수찬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로 사신 와서 그녀의 시문을 읽고 매우 경탄했다고 한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주지번은 성균관 명륜당 현판을 썼으며 당시 접빈사가 허균이었다. 주지번은 난설헌의 글을 중국으로 가져가서 중국에서 문집을 발간해 큰 인기를 끌었고 중국 문인들이 애송했다.

1711년 부산 동래에 온 일본인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에서도 난설헌 문집이 발간됐다. 우리 시문이 중국과 일본에서 문집으로 발간된 경우는 무척 드문데 이처럼 난설헌 문학은 빼어났다. 당시 선비사회에도 그녀가 널리 알려져 류성룡은 서애집에 시에 능한 여자로 난설헌을 소개하며 그녀의 시 두 편을 문집에 실었고, 조선후기 지식인 사회도 그녀를 뛰어난 규방시인으로 평가하며 문학적 천재성을 인정했다.

추사의 '전하지 못한 편지'
제주 유배시절 투병 중이던 아내
걱정하며 편지썼지만 답장은 부음
"내세에는 처지를 바꿔 태어나자"
슬픔 삭이고 2년 후 세한도 그려

◆추사의 아내 만시, 도망(悼亡)

2021100801000086000003312

추사 김정희는 안동김씨 세력과 싸움에서 패하여 나이 55세에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를 당하는데 유배지에서 아내 예안이씨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며 만시를 지었다. 35년을 해로하다가 먼저 간 아내이기에 유배의 몸으로 지켜주지 못한 슬픔을 시로 승화시켰다.

'어쩌면 저승의 월로에게 애원하여/ 내세에는 그대와 나의 처지를 바꿔 태어나/ 나 죽고 그대 혼자 천리 밖에 살아남는다면/ 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련마는.'

추사는 일생 동안 걸핏하면 아내에게 한글편지를 썼다. 현재 남아 있는 편지가 30통이나 되니 없어진 것을 감안하면 매년 서너 통은 쓴 듯하고 대부분 아내에게 투정부리거나 달래는 듯하니 금실이 무척 좋았다. 그런 아내에게 바치는 마지막 헌시, 도망(悼亡)은 만시의 백미로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제주도 유배생활 3년째 접어든 1842년 11월, 아내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썼는데 풍랑으로 배가 떠나지 못하자 간절한 마음으로 나흘 뒤 또 한 통을 써 같이 보냈는데 아내는 이미 닷새 전에 세상을 떠났다. 유배지에서 답장을 기다리던 추사가 아내 부음을 들은 것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아끼고 사랑한 아내 죽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으로 통곡했지만 슬픔을 달래고 자신을 다스려 2년 뒤 유명한 세한도를 그린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며 만시를 지었고 만시는 죽은 자에게 바쳐진 마지막 헌사로 인문학 속에 남아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