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의 일상의 시선] 구절초, 폐허가 치켜든 생명의 흰 피켓

  • 이하석 시인·대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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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22   |  발행일 2021-10-22 제22면   |  수정 2021-10-22 07:10
수많은 민초들 처형된 자리
그 폐허 위에 돋아난 구절초
대구 시월항쟁 대표하는 꽃
임하호 인근 검게 탄 나무숲
새 생명력의 상징처럼 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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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대구문학관장

#구절초(九節草)

가을을 들국화의 계절이라 한다. 그러나 식물도감에는 들국화가 없다. 쑥부쟁이, 구절초, 개미취, 감국 등 산야에 피는 비슷한 모양의 꽃들을 통칭하여 들국화라 부르는 게다.

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힐난한 시가 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을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안도현의 '무식한 놈' 전문)

그 가운데 구절초가 시월의 대표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과 들에 흔하게 구절초 흰 꽃들이 바람에 쓸린다. 구절초(九節草)는 음력 9월9일 중양절에 채취하면 약으로 유용하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넓은잎구절초·구일초(九日草)·선모초(仙母草)·들국화·고뽕(苦蓬)이라고도 한다. 중양절 때를 전후하여 구절초꽃이 만발한다. 하얀 꽃이 가는 꽃대 끝에 달려서 연약하며 바람에 민감하다. 가정에서 관상용으로 많이 심지만, 산야에서 나는 산구절초가 더 애련하다.

한국 산야의 어디서든 피어 있다는 점에서 구절초는 기억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모은다. "1948년 10월26일과 27일 여수 시가지를 향해 기관총과 박격포로 쏘아대던 곳. 그때의 총탄 냄새를 기억하듯 그때와 똑같이 언덕에는 하얀 구절초가 피어 있었다"라는 글이 떠오른다.

대구 시월 항쟁을 기억하고 대표하는 꽃이 구절초인 것도 그 점에서 인상적이다. 수많은 민초들이 처형된 자리, 그 폐허 위에 돋아난 구절초는 얼마나 애잔한가. 대구 시월 항쟁 유족들과 시인이 함께 가사를 쓰고, 노래를찾는사람들 문진오가 곡을 입혀 노래한 10월항쟁 추모곡에도 "10월의 하얀 구절초/ 곱게 곱게 핀/ 사랑길만 짚어/오세요"라는 구절이 있다. 구절초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는 그런 비극성이 있다.

#폐허

안동 임동면 망천의 임하호가 새파랗게 내려다보이는 야산에도 흰 구절초 꽃들이 피어 있다. 불타버린 폐허 위라는 점에서 더욱 안간힘으로 핀다는 느낌! 이곳은 지난 2월21일 오후에 발생해 20시간 동안 이어진 산불 피해 현장.

이 산불로 307헥타르에 걸쳐 38만 그루의 소나무들이 불탔다. 검게 탄 나무숲 아래로 고사리와 떡갈나무 새싹들이 올라오는 가운데 구절초도 산부추, 용담 등과 함께 어렵사리 발견된다. 그래, 검은 폐허 속으로 강인하게 치켜든 생명의 피켓 같다.

이곳을 찾은 문인들은 불 냄새 속에서 사리를 찾듯이 폐허 속을 헤맸다. 남부지방산림청과 모천사회적협동조합이 마련한 '산불 피해 현장 문인 답사' 자리였다. 그 사리의 하나가 구절초였다.

아름답지만 애잔했다. 산불 현장 답사를 마친 문인들이 한 무덤가에서 산림치유사로부터 '숲과 사람'의 강연을 듣는 동안에도 문인들은 검은 숲속에서 일렁이는 흰 빛의 산란을 돌아보곤 했다.

산불은 느닷없이 발생하여 엄청난 산림자원을 태워버린다. 그야말로 '녹색을 집어삼키고 검정으로 변한 지옥도'의 재앙이다. 산불 진화에 나선 산림청 직원들의 악전고투의 현장. 그 폐허 위에서 문인들은 탄식했다. 그 탄식의 끝에서 구절초가 새로운 생명력의 상징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시인·대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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