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북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세상의 아픔 달래는 듯…절벽 석굴서 빛나는 1400년의 미소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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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19   |  발행일 2021-11-19 제13면   |  수정 2021-12-0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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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발견된 군위 삼존석굴은 이후 마을 사람들이 초막을 지어 도량을 지켰다고 한다. 석굴의 입구는 원지름이 4m 정도 되고,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한티재 오르는 길을 살필 새도 없이
팔공산터널로 빨려든다.
터널 속에 뜬 두어 개의 무지개를
지나 지상으로 나오면 두꺼운
회색 구름의 찢어진 가장자리에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몽글거리는
이상한 가을이 열린다.
낙엽 같은 빗방울과 소나기 같은 햇살이
갈마드는 길을 따라 둔덕, 멀미와
같은 마을을 지나는 동안,
먼 왼쪽에서부터 쫓아오던 산자락이
갑자기 성큼성큼 앞서가더니
정면 저만치에 우뚝 서서 기다리고 있다. 강철 같은 얼굴에 박힌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돌연 햇살이 빗금을 그으며 눈동자를
반쯤 밝히는 순간 그 가운데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았다.
군위의 삼존석굴이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불 켜진 몇몇 가게 앞에 배부른 사람들이 느긋하다. 그들의 느린 움직임을 천천히 뚫고 나아간다. 주변을 온통 그늘지게 하는 헌걸찬 솔숲이 나타나고, 숲을 둘러싼 낮은 돌담 너머의 양지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가을빛으로 물든 나무들 아래 하얀 바위를 타고 둔덕천이 흐른다. 둔덕마을 즈음에서 흘러온 이 물길은 한밤마을에서 남천에 합류한다. 맑디맑은 물길 위에 극락교가 놓여 있다. 다리 저편 정면에는 비로자나불이 정좌해 있다. 화살 같은 정면 응시에 걸음이 불편해진다. 비로자나불은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이고 불교의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이다.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데 오른손은 부처를, 왼손은 중생을 상징한다. 극락교를 건너 비로자나불로 향하는 것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불편은 오롯이 나의 문제다.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을 바라보면 비로전과 모전석탑, 그리고 삼존석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빛이 도는 깎아지른 벼랑이다. 팔공산 비로봉 한줄기가 뻗어내려 이룬 암벽이라 한다. 암벽 아래는 꽤 깊은 계곡이다. 수량은 적지만 빗소리를 내는 계류가 둔덕천으로 흐른다. 계곡에서부터 약 20m 높이에 석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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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서원의 누삼문인 읍청루 앞에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다.

석굴은 1927년 한밤마을에 살던 청년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벼랑 위 나무에 밧줄을 묶어 암벽을 내려오다 온통 덤불로 뒤덮여 있던 굴을 발견한 것이다. 덤불을 헤치자 삼존불이 나타났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초막을 지어 도량을 지켰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 삼존불이 소실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공덕이었을 것이다. 삼존석굴이 처음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62년이다. 바로 그해에 삼존석굴은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군위 삼존석굴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 사원으로 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경주의 석굴암보다 1세기 정도 앞서 만들어졌지만 뒤늦게 발견되어 제2 석굴암으로 불렸다. 정식 이름은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이다. 석굴 입구는 원지름이 4m 정도 된다. 내부 바닥은 네모지게 반듯하고 천장은 반달모양이다. 그 가운데 아미타불이 앉아 계시고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모두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다. 협시보살에 의해 본존불은 아미타불로 상정되지만 오른손이 땅을 가리키는 모습은 석가모니불의 수인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인가, 아미타불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한다.

"우째 저래 모셨을꼬." "맞재. 대단타." 차가운 바닥에 온 몸을 조아리며 정성스러운 절을 마친 부인들이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아미타불이든 석가모니불이든, 그저 두 손을 모으게 하는 부처님이시다.

1927년 마을 청년 우연히 발견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 앞서
1596년 손기양 관련 기록 남겨

박정희, 1963년 3천만원 시주
석굴 앞엔 비로전·모전석탑도
인근 양산서원과 절 병존 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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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전과 모전석탑. 모전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경북문화재자료 제241호다.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삼존석굴을 마주 보는 자리에 모전석탑이 서 있다. 삼존불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본래 3층이었으나 탑신부에 자생한 소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탑도 같이 무너졌고 194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무너졌으나 다시 일어섰을 때, 가장 순수한 형상만이 남은 모습은 감동적이다.

시간이 흘러 삼존석굴이 국보로 지정된 이듬해인 1963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와 3천만원을 시주했다. 그 돈으로 석굴 앞에 계단을 올리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석불교를 놓는 등 주변을 정리했다. 그전까지는 석굴에 밧줄 사다리 하나가 걸려 있었고 주변은 절터만 남아 황무지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비로전은 1973년에 세웠다. 이후 1985년 주지로 부임한 법등스님이 30여 년 동안 정성을 쏟았고 현재는 삼존석굴 주변으로 선원과 범종각, 전통문화교육원, 관음전, 삼성각, 용왕당 등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나란히 서원(書院)이 자리한다. 절터에 서원이 들어선 예는 종종 보았지만 사찰과 서원의 병존은 처음 보는 듯하다. 서원은 정조 10년인 1786년에 설립된 양산서원(陽山書院)이다. 고종 때 훼철되었지만 차근히 중건되어 매우 반듯한 모습이다. 원래는 지금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서원은 부림홍씨(缶林洪氏)인 경재(敬齋) 홍로(洪魯),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등을 배향하고 있다. 경재 홍로는 고려 말 정몽주의 문인이다. 한밤마을이 고향인 그는 낙향하여 이 근처에 살다가 고려가 망하던 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7세였다. 삼존불은 젊은 충신의 슬픔을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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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교를 건너면 비로자나불이 정좌해 있다. 9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며 경북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이 있어서 이 마을은 서원마을이다. '중종 경인8월'에 '서원'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1530년경 이미 이곳에 서원이 있었을 것이다. 그즈음 삼존석굴의 존재는 확연했다. 선조 29년인 1596년에 오한(鰲漢) 손기양(孫起陽)은 '부계상촌 서쪽에 우뚝 솟은 바위절벽이 있는데, 암면의 석굴에 감실이 있으니 그 안에 석불 삼구가 봉안돼 있다. 세상에서 이곳을 불암(佛巖)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시를 남겼다.

'오래전 귀신이 도끼로 갈라 공중에 걸었는데 /석굴을 여니 감실 앞은 인간세상이구나/굴 안에는 부처 세분이 먼지를 덮어쓴 채/천년토록 독경하며 풍연을 지켜왔네.'

삼존석굴의 옛 이름은 '불암'이었다. 불암은 언제 덤불로 뒤덮였을까. 양산서원 누마루 앞에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마구 떨구고 있다. 사당의 담장 밖에는 400년 된 왕버들 세 그루가 아직 푸른 잎을 천천히 떨구고 있다. 이들은 분명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서운한 가을이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중앙고속도로 칠곡IC로 나간다. 5번 국도를 타고 다부·가산 방향으로 가다 동명사거리에서 우회전해 한티로로 직진한다. 가좌교차로에서 8시 방향으로 나가면 팔공산터널이다. 터널을 빠져나와 남산리 방향으로 가면 된다. 한티재 넘어 부계방향으로 가도 좋다. 주차비나 입장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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