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주 감포읍 송대말 등대…거친 겨울바다 새하얀 무인등대…지키는 이 없어도 희망이 빛난다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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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03   |  발행일 2021-12-03 제13면   |  수정 2021-12-0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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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성한 소나무들 사이로 송대말 새 등대가 보인다(위쪽). 옛 송대말 등대. 전면 사각의 구조물은 1933년 설치한 등간으로 보인다.

감포항의 북쪽,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곶을 송대(松臺)라 한다.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높고 평평해 사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감포읍의 어수선한 활기가 한풀 꺾이면서 포항 방향의 31번국도 옛길이 고갯 마루를 휘도는 바로 그 자리가 송대의 허리쯤 된다. 오르막에서부터 남쪽으로 기울어진 소나무들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 언덕에는 노송으로 둘러싸인 제당이 높다. 고갯 마루에 닿기 직전 송대의 끝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듬성듬성한 솔숲 앞에 주차장이라 할 만한 공간이 있다. 남향의 양지바른 자리에 낮은 봉분 하나가 엎디어 있고 그 아래로 감포항 방파제와 내항의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다. 봉분 앞에 한 사내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항구를 바라보고 있다.

1933년 처음 기둥 세우고 등 달아
선박 늘어 1955년 무인등대 설치
2001년 옛 등대 인근 새등대 세워
건물 내부 미디어전시관 조성 중

절벽 아래 펼쳐진 주상절리 장관
일제강점기 자연수족관으로 활용
조선인 기생 사랑 이야기도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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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의 끝으로 다가가면 남쪽으로 감포항의 방파제와 내항이 내려다보인다.

◆ 송대말 등대

오솔길을 따라간다. 송대의 끝으로 다가갈수록 멋있는 소나무들이 많다. 서로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그늘은 넓고 맑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송대에는 수령 300~400년 이상 된 노송이 울창했다고 한다. 송대의 허리 아래에서부터 도로를 가로질러 송대 끝까지 오래된 해송이 빽빽했다고 전한다. 제당의 소나무들도 수령이 400년이다. 마을 사람들은 할배·할매 소나무라고 부르며 수호신으로 여긴다. 그 많던 소나무들은 신작로를 내고 농지를 개간하면서 숱하게 사라졌고 태풍 사라와 매미 때도 제법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다. 또 송대 끝에는 여러 성씨의 오래된 무덤들이 운집해 있었다고 한다. 양지바른 봉분은 그 사내가 지켰다는 생각을 한다.

소나무들 사이로 바다와 함께 등대의 새하얀 몸이 보인다. 송대의 끝에 있는 등대, 송대말(松臺末) 등대다. 등대는 두 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옛 등대,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새 등대다.

일제강점기 현대 항구의 개설은 조선총독부의 전조선 계획개발의 일환이었다. 1920년 감포항이 개항되었고 1925년 남방파제인 '축항'이 준공되었다. 동시에 일본 시코쿠 지방의 영세 유자망 어민들이 집단 이주해왔다. 송대말 등대의 시작은 1933년이다. 감포항 인근 해역에는 암초들이 길게 뻗어 있어 작은 선박들의 사고가 잦았다. 그래서 암초들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1933년 2월 감포어업협동조합에서 기둥을 세우고 등을 달았다. 사각의 철조 기둥에 부동렌즈 전등을 하나 단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이 등간(燈竿)의 이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대는 높고 해송의 숲은 진정 울창했다.

이후 감포항 이용 선박이 점차 늘어나게 되면서 1955년 6월 송대말에 무인등대가 설치됐다. 오른쪽 등대다. 등대 앞에 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안내판은 없지만 이것이 옛 등간인 듯하다. 1964년에는 대형 등명기를 설치하면서 유인등대로 전환되었고 2018년에 다시 무인등대가 되었다. 그리고 2001년 새로운 등대가 세워졌다. 왼쪽 등대다. 1층과 2층은 맞배지붕에 회랑이 있는 큼직한 건물이다. 내부는 '감포지역과 등대'를 주제로 한 미디어 전시관으로 현재 조성 중이다. 맞배지붕 위에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본따 만들었다는 등탑이 올라서 있다. 멋은 없지만 의미는 있다. 새로운 송대말 등대가 세워졌을 때 등대에는 등대지기가 있었다. 그러다 2018년 11월 무인 등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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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노송으로 둘러싸인 선창마을 제당.

◆ 송대말 바다가 전하는 이야기

옛 등대 앞에서 바다를 본다. 거칠게 떨어지는 절벽 아래로 바다로부터 솟구쳐 오른 주상절리들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 오늘 든바다는 잔잔했지만 이곳 바위로 몰려든 파도는 사나웠다. 주상절리의 섬세한 주름들을 바라보다 문득 바위와 바위 사이를 가로질러 시멘트 계단과 다리와 같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구조물이 동해 바다의 사나운 파도를 얼러 잔잔한 바다수영장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곳은 어느 순간부터 스노클링으로 사랑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난여름에는 수영과 스노클링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송대말의 주상절리는 일제 강점기 수족관으로 쓰였다고 한다. 일본인 오다 도모기치가 사재를 투자해 만든 것으로 당시에는 '오다공원'이라고 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돌이나 시멘트로 칸을 질러 10개 정도 되는 자연 수족관을 만들었고 어민들이 잡아 온 가자미, 전복, 광어, 고래, 돔 등을 보관했다. 담을 높여 물개도 키웠고 지붕도 덮어 두었다고 한다.

절벽에서 수족관으로 내려가는 난간을 갖춘 나무다리가 길게 있었고, 절벽의 중간쯤에는 다다미방 열 칸 규모의 화양정이라는 빨간색 지붕의 찻집과 술집이 있었다. 수족관은 유료로 운영되었고 일본인을 중심으로 돈깨나 있었던 사람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그들은 가둬진 물고기들을 구경하며 술이나 차를 마셨다. 감포 읍내에서 올라온 일본 기생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기도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사교와 풍류의 장소였다. 이에 대한 간략한 안내판과 옛 사진 몇 장이 등대 옆에 있다. 글이 너무 희미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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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말의 주상절리. 일제강점기에는 수족관으로 쓰였고, 지금은 자연 수영장으로 애용된다.

이곳에 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송대말의 화양정에는 아리라는 조선인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하야시 대좌가 있었다. 하야시는 아리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광복이 다가오자 조선을 떠나야 했던 하야시는 아리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아리는 고민했다. 사실 아리와 그녀의 오빠는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아리는 하야시 대좌를 통해 많은 정보를 빼내 왔었고 그녀가 번 돈은 독립자금으로 쓰였다. 그러는 동안 아리 역시 하야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하야시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리의 오빠는 그녀에게 총 한 자루를 주었다. 떠나기 전날 아리와 하야시는 송대말 등대 앞에서 만났다. 그리고 두 번의 총성이 무성한 송대 숲을 흔들었다고 한다.

슬픔 없는 땅이 어디 있겠나. 또한 기쁨 없는 땅도 없다.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동해를 지키겠다던 문무왕 시절부터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름 없는 이들의 시대도 지났다. 오늘 바위를 치는 파도는 사나웠지만 바다 수영장의 옥빛 물은 맑고 잔잔했고 지난여름의 폭죽 같은 웃음소리가 저 깊은 바다로부터 솟아오르는 듯했다. 태양은 오랜만에 따사로웠고, 양지바른 봉분 앞의 사내는 아직도 오도카니 앉아 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나가 직진하다 배반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간다. 불국사역 지나 조금 더 가면 불국사·감포 방향 이정표가 있다. 불국사 방향으로 좌회전, 직진하다 감포 방향으로 우회전해 토함산터널을 통과하면 감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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