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술·도박·뇌전증·빚' 자신의 소설보다 더 극적인 삶 살다간 대문호

  •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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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7   |  발행일 2022-01-07 제38면   |  수정 2022-01-07 08:40
군사공병학교 때 아버지 비명횡사 소식 듣고 지병 되는 뇌전증 앓아
'가난한 사람들' 대성공 거둔 후 잇단 작품들 주류 문단서 혹평
반정부 활동으로 투옥된 후 극도의 강박감으로 평생 도박에 중독
4년간 옴스크감옥살이 '죄와 벌' '죽음의 집의 기록'에 생생히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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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학사에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 러시아 양대 대문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고(故) 마광수 교수는 "우리나라 문인들한테 세계문학 사상 가장 걸출한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개는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라고 대답한다. 톨스토이나 플로베르, 헤밍웨이, 위고 등 허다한 문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가 누리고 있는 문학적 위상(位相)과 명예를 좇아갈 만한 작가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셰익스피어나 괴테 같은 문호가 도스토옙스키에 버금갈 만한 영광을 누리고는 있지만 한국작가들의 창작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느냐는 점에 있어서는 도스토옙스키에 비교가 안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들만큼 아니 오히려 더욱더 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후의 혼란에 휩싸였던 당시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은 1821년 구제병원 의사인 아버지와 상인의 딸인 어머니 사이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의과대를 졸업한 후 나폴레옹전쟁 때 군의관으로 차출되었다가 구제병원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가족에게 폭군과 같이 군림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나중에 상처(喪妻)한 후 옮겨 간 시골 영지에서 농노에게 살해당해 자식들 특히 도스토옙스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기기도 했다.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자신의 사생아에게 살해를 당하는 아버지 표도로의 모델이라는 평가도 있다.

아버지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하에 가족 이외엔 병원 뜰에서 환자들과의 대화도 금지된 채 모스크바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어머니가 사망한 15세 때 형 미하일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공병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의 비명횡사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에 빠져 후일 지병이 되는 뇌전증을 앓게 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1849년 반정부 활동 혐의로 처형 직전 사면되어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던 무렵에 발병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 충격으로 평생 아버지의 사망에 대해 발설한 적이 없었다고하지만 그가 군인이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는 데는 일조한 듯하다.

1845년 그의 나이 24세, 중위로 제대한 후 희곡도 쓰고 발자크의 '으제니 그랑데'를 번역하는 등 활발하게 일했지만 알코올 중독, 도박 그리고 무절제한 낭비와 사치로 파산 지경에 빠진 그는 이번에 실패하면 네바강에 투신할 각오로 쓴 '가난한 사람들'이 급기야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새로운 고골리의 탄생'으로 칭송받던 그의 첫 소설은 다소 형상화가 부족했고 이어 발표한 '분신' '이중인격' '프로할틴'은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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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1866 속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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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립도서관 앞 도스토옙스키 동상.

주류문단에 주눅이 든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모임 페트라세프스키회에 들어 반정부활동을 하게 되고 이것은 1849년 니콜라이 1세 비밀경찰들의 내사로 투옥, 총살형을 선고받게 된다. 다행히 그것은 불온사상에 젖은 청년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황제의 '쇼'였으나 그것을 알 리 없었던 그는 사형대에 죽음을 맞기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던 극도의 강박감 때문에 평생 광적인 룰렛(카지노 도박)중독이 되어버렸다.

1850년 1월 사형선고 집행 직전 특사로 4년간 시베리아 유형과 4년간 군복무를 언도받은 그는 유형지인 옴스크로 가는 도중 만난 데카브리스트(1825년 무장봉기를 일으킨 러시아 혁명가들)의 아내들에게 신약성서 한 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형기 동안 유일하게 지니도록 허락된 책이었다. 글 한 줄 쓰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그는 성서의 모든 구절을 읽고 또 읽었고 그것은 나중에 그의 글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성서는 임종을 맞은 그의 머리맡에까지 놓여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옴스크감옥에서의 4년은 '죄와 벌' '죽음의 집의 기록'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어진 4년 보병연대 복무환경도 감옥과 별반 다름없었다. 이미 중위로 제대한 경력도 있었지만 병사로 복무해야 했던 그에게 전보다 나아진 것은 짧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뿐이었다. 그때 유부녀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와 결혼한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은 아니었다. 1859년 마침내 유형에서 풀려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형 미하일과 잡지 브레미아를 창간, 전속작가가 되어 연재한 소설 '학대받는 사람들'이 놀랄 만한 인기를 끌어 성공한다. 하지만 1863년 그것을 시기한 출판사들의 중상모략에 넘어간 검열당국의 어리석음으로 잡지는 발행정지 당하고 만다.

1864년 다시 창간한 잡지 예보아 발간 한 달 후, 큰 빚을 남기고 형 미하일이 사망한다. 연이어 별거 중이던 아내 마리아도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것은 형의 가족과 의붓아들 그리고 엄청난 빚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끊지 못한 도박은 그를 극한 상황까지 몰아댔고 급기야 그는 한 출판업자와 가혹한 조건의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때 마치 구원자처럼 나타난 이가 25세 연하의 속기사 안나 그레고리에브나였다. 26일 만에 그의 구술을 안나가 받아 적은 소설 '도박자'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위기를 넘긴 그는 안나를 끈질기게 청혼해 1866년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후 15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일, 그의 여전한 도박, 수시로 발병하는 뇌전증, 의붓아들과 죽은 형의 가족(특히 조카는 불량해 삼촌 협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부양, 파산, 엄청난 빚, 가불한 선인세로 인한 원고 독촉 등이 있었지만 아내 안나는 번번이 좌절하려다가 다시 일어나서 꿋꿋한 남편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안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것을 피해야 함을 직감해 드레스덴으로 이주했고 4년간 파리와 베를린 등지를 여행하며 그는 '백치' '악령' '미성년' 등을 썼다. 그의 도박 중독은 독일 정부의 룰렛 금지령으로 도박장이 폐쇄되어 결국 강제 치유된다.

1871년 드레스덴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출판사와의 계약에 매여 남편이 집필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포착한 안나가 직접 출판사를 차려 작품을 철저히 관리하였고 그 덕에 그의 가족은 스타라야 루사라에 2층 목조주택을 구입할 정도로 경제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슬하의 네 남매 중 두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기도 한다. 이전에는 빚과 도박에 쫓겨 글을 썼다면 이때부터 죽는 날까지는 마치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처럼 썼다는 말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나온 작품이 바로 마지막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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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동시대의 작가들인 푸슈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과는 존경과 애증의 관계를 맺었는데 그의 붙임성 없고 호전적 성격이 한몫했다는 설도 있다. 임종 며칠 전 백모 크미나나의 유산을 둘러싸고 누이동생 베라와 언쟁을 벌인 뒤부터 악화된 건강이 폐기종 진단을 받은 뒤 1881년 1월28일 머리맡에 놓인 신약성서를 아무렇게나 펼쳐 자신의 마음속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며 사랑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아내 안나에게 읽게 하고 그는 영면한다. 향년 60세, 아내 안나가 읽은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제3장 제2절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알겠소?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란 말은 내가 죽는다는 뜻이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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