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의 사람과 선(線)] '사유의 방'을 나서다...번뇌하고 수행하며 사유하다가, 마침내 도달한 깨달음의 찰나

  • 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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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14   |  발행일 2022-01-14 제38면   |  수정 2022-01-1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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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것은 자유"라고 했던 이가 키케로다. 그는 로마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요 철학자요 저술가요 변호사였다. 비리로 고발당한 시칠리아의 한 법무관이 자신의 벌금을 낮추기 위해 그의 변호인에게 상아로 만든 스핑크스를 선물한다. 상아 스핑크스를 뇌물로 받은 그 변호인은 법정에서 키케로의 변론이 수수께끼 같아 도저히 풀 수 없다고 비아냥거린다. 순간 키케로는 "집에 스핑크스를 두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느냐"며 다그쳤다는 상아 스핑크스 수수께끼 일화는 유명하다.

국보 제78호·83호 지정 반가사유상
오른손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깨달음 상징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없이 평온

금동으로 된 반가사유상 세계 70여점
그중 20여점은 우리나라에서 보관
예술적 완성도·숭고미 '으뜸 평가'


◆수수께끼 인문학

수수께끼는 늘 흥미롭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뭐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잡아 먹히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로부터 '나는 어디로부터 왔을까'라는 원초적인 물음에 이르기까지 숱하다. 수수께끼에 관한 책만 해도 엄청나다.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투란도트 공주에 청혼한 왕자들이 세 가지 수수께끼를 못 맞히면 그 왕자는 다음 날 참수를 당한다. 긴 긴 겨울밤 무거운 무명 솜이불 아래서 스무고개와 함께 고개를 넘을 때마다 어려워지는 수수께끼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열매 될 꽃은 첫 삼월부터 안다질 않는가. 그 삼월의 대선을 앞둔 대선 가도에도 비단 보따리와 함께 수수께끼가 등장했었다. 유권자들 중 특히 젊은 표심을 어느 정도 자극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를 둘러싼 상상력이다. 루마니아 태생 프랑스의 극작가 이오네스코는 "자유로운 상상은 시시하고 무능한 자들이 도피라고 부르고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발명 창조"라고 했다. 현실적인 능력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수수께끼 아이디어는 발명과 창조의 모티프다. 서로를 으르렁대며 바짝 긴장한 가운데 마른 입안에서 찾아낸 '침샘' 같기도 하다. 간혹 침이 너무 많이 흘러 난감할 때가 있다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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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국립중앙박물관이 '사유의 방'이라는 전시실을 지난달 12일 마련됐다. 이 전시실에는 국보 제78호·제83호로 지정된 딱 두 점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전시돼 있다. 전시실 입구에 걸린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부제가 은근히 매섭다. 거친 싸리나무나 껍질 깐 말간 닥나무 회초리 같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드는 매라 하여 '回初理(회초리)'로 쓴다는 속설이 속절없이 이해가 된다. 나눠주는 작은 팸플릿을 들면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깨달음의 상징입니다'라는 글귀가 절로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그런 궁금으로 잔뜩 긴장한 채 잠시 미로 같기도 한 길을 따라 이내 전시실에 도달하면 별빛 궁륭 아래 은근한 황톳빛 허리 조명과 함께 두 분의 반가사유상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계신다. 처음에는 희뿌연하다가도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뚜렷해지는 용모며 자세에 비로소 눈이 조금씩 열린다. 입구부터 괜히 치민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고 층간 소음 같은 발자국 소리도 어느새 자연스러워져 반가사유상과의 인연이 한 올씩 맺어지는 게 스스로 경이롭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공들여 지은 전시실은 조명이며 분위기며 공기의 탁도며 소리며 어느 곳 하나 빈틈이 없다지만 두 반가사유상을 둘러싼 우리는 청춘남녀요 장삼이사들이다. 어떻게 보면 반가사유상 두 분이 우리를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어떨까마는 미안해서다.

우리는 지금 대체로 내가 중심이 되는 '나중시대'를 살고 있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고 '트렌드 코리아 2022'는 적고 있다.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시실에는 의외로 젊은층들이 해맑은 표정에다 깊숙한 눈길로 반가사유상을 함께 사유하듯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해마다 발행되며 재기발랄한 용어나 단어, 표현, 제스처, 형식, 스타일 등 사회의 중요한 트렌드나 특성을 집어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높이 93.5㎝, 경주 남산 선방골 부근에서 발견됐다. 7세기 전후 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 가장 크다. 그리고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역시 금동이다. 안동에서 나왔다. 높이 80㎝. 반가사유상은 오른쪽 다리를 구부려 왼쪽 다리에 척 걸치고 오른쪽 팔꿈치를 힘들지 않게 구부려 길고 가냘픈 오른쪽 손가락으로 슬쩍 오른쪽 뺨에 부드럽게 닿는다. 이럴 때 터지는 저 완만·조용한 함성이다. 어떤 이는 이를 번뇌하고 수행하며 사유하다가 마침내 도달한 깨달음의 찰나를 포착한 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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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저 미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더하는 저 미소. 오른발을 들어 올려 걸치는 일이야 누구든 하는 버릇이다. 이게 반가(半跏)양식이다. 오른 손가락을 뺨에 살포시 대보는 일도 흔하다. 사유(思惟)양식이다. 이를 합해 깊은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반가사유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미소. 저 미소. 은근에 깊이를 더한 끝에 지어진 미소를 보는 순간 마치 영혼이 맑아지고 가슴에 울림은 이어져 이윽고 삶의 보람이 깨쳐지는 거다. 힘들고 고민 덩어리로 점철된 나의 감정들은 따뜻한 이 미소에 저절로 응해진다. 긴 고뇌 끝에 얻은 깨달음. 모든 종류의 창조적 사고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이입이다. 누구에게나 힘든 순간과 어려움은 종교와 상관없이 찾아온다.

900여 년 전 중국의 소동파는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대나무가 내 속에서 자라나게 해야 한다. 손에 붓을 쥐고 눈으로 집중하면 그림이 바로 내 앞에 떠오른다. 그럼 그것을 재빨리 잡아채야 한다"고 했다. 오랫동안 갈고 닦으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감정이입의 직관력을 배양한 결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창조적인 사람은 감정이입적인 상상력을 촉발하고 증진 시킨다. 마찬가지다. 가장 완벽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다. '사유의 방'에서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스스로 몰입하다 보면 번개 같은 번뜩임과도 만날지 모른다.

우리의 반가사유상은 처음에는 아마 얻기 쉬운 재료, 즉 나무와 흙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재료는 오래가지 않는다. 나무로 만든 오직 하나는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전해지고 있다. 당연히 흙으로 조성된 반가사유상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그 뒤로는 금속과 돌이 이었다. 오늘날 전래하는 반가사유상이다. 황수영 박사가 작성한 우리나라 반가사유상 목록에는 일련번호가 38까지 있다. 38번이 우리나라 적송으로 만들어진 일본 국보1호(조각부분)다. 이 반가사유상과 우리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너무 닮았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일본의 적송 반가사유상을 보고는 '가장 완벽한 미소'로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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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 모나리자 & 반가사유상

'사유의 방' 두 반가사유상은 은근히 지은 미소에 있어서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가장 인간적인 사유의 모습은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는 당연히 그 의미가 다르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깊은 사유에서 오는 미소라기보다는 신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의 반가사유상 미소는 그저 편안하고 아기의 방긋 웃음을 보는 듯 순진하며 영혼을 달래듯 순결한 느낌이다. 로댕의 작품에는 지옥문이라는 청동 문의 일부로 제작됐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저주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하는 모습이 묘사됐다. 이를 우리는 근육질이며 굵은 눈썹이며 황소 같은 목덜미, 야성적인 용모 등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내 머리에 모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마찬가지로 내 대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지만 이런 게 로댕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은 친근하다. 누구나 위안을 느낀다.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 모습이 마치 물 흐르듯 한없이 평온하다. 금동으로 제작된 반가사유상은 세계적으로도 70여 점에 불과하며 그중 20여 점이 국내에 있으니 이만하면 우리나라가 보배스러운 나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금동반가사유상은 예술적 완성도와 숭고미에서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들은 그 나름의 빼어난 문화재들을 지니고 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코로나 이전에는 한 해 관람객이 1천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코로나 시대에는 많이 한가롭지만 '모나리자'가 있는 루브르 드농관에는 지금도 매일 관람객들로 연일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붐빈다는 것.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도 매년 관람객이 300만명을 넘는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발돋움했다. 소장 유물만도 41만여 점에 국보 내지 보물급만 300여 점에 달한다. 이번 사유의 방에는 그 중 딱 두 점 국보 금동반가사유상을 전시해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세계적인 반열의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계기가 됐다.

나는 사유의 방을 나선다.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투명한 배짱으로 나서 보지만 얼음 바람 치는 우리 동네는 여전히 코로나19, 백신, 소상공인 보상, 부동산, 대장동, 가짜, 환경, 거짓말, 도박, 화재, 추락사, 스토킹, 보이스피싱, 패싱, 역차별 등 별별 이미지로 뒤범벅이다.

이제 나는 시인 나희덕의 '서시' 전문을 음미해 보고 싶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반가사유상이 뒤따라 올 듯도 해/ 머쓱하게 뒤돌아보았지만/ 난데없는 겨울바람만 등으로 감긴다'
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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