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무용지물 되는 '사회적 합의', 누구 책임인가

  •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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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18   |  발행일 2022-01-18 제22면   |  수정 2022-01-1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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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 연말 CJ대한통운 달서터미널에는 매서운 한파 속에 천막이 쳐졌다. 농성장 택배노동자들은 사측에 사회적 합의 준수를 촉구했다. 2년간 20여 명이 과로사로 죽고도 끝나지 않은 그 싸움은 작년 1월 파업으로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은 집하와 배송 외에 분류작업에서는 제외해줄 것을 요구했다. 노조와 택배사, 정부가 참여한 사회적 합의기구에서 그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분류작업은 기존 노동자들 몫이었다. 6월 2차 파업이 있었다. 이번에는 주60시간 노동, 2022년부터는 분류작업 완전 제외, 택배비 인상분 전액을 분류인력 채용과 노동자 처우 개선에 쓸 것이 합의됐다. 정부는 합의 이행 감시를 약속했다. 그런데 10월에 다시 3차 파업이 이어졌다. 노조는 인상된 택배비 일부를 사측이 회사 이익으로 가져가 사회적 합의를 위반했다고 폭로했다. 정부는 뒷짐을 졌다. 노조는 결국 작년 연말 4차 파업을 조직했다.

실상은 어떤가. 이달 현재 노동자 64%는 여전히 분류작업에 동원되고 있다. 사측은 노조의 거듭된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인상된 택배비를 항목별로 어디에 얼마만큼 쓰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올해 새로 오르는 택배비도 어디에 쓸지 밝히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다른 택배사와는 달리 유독 CJ대한통운만 별도의 부속합의로 주6일제 및 당일배송 원칙을 강제하는 데에 있다. 주60시간은 과로사 예방을 위한 사회적 합의사항이다. 부속합의를 지키려면 주60시간을 넘길 수밖에 없다는 노조의 주장에 대해 사측은 반박을 못한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서 사용자들이 사회적 합의를 어겨온 역사는 짧지 않다. 2005년 기륭전자는 200여 명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1천895일의 파업 끝에 국회 합의로 정규직 고용이 약속됐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사례도 그랬다. 노동자 김진숙의 크레인 고공농성과 희망버스, 조남호 회장의 청문회를 거쳐 2011년 사회적 합의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노동자들은 다시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두 명이 자결했다. 사회적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목숨을 건다. 하지만 사용자들에게 사회적 합의란 일시적으로 국민적 지탄을 피하는 수단 이상이 아니다. 최근 CJ대한통운 사측이 보여주는 모습도 걱정된다. 작년 6월 중앙노동위원회는 CJ대한통운이 택배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을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했다. 그런데 사측은 아직도 교섭을 거부한다.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란다. 대신 노조 비난에는 열을 올린다. 그러나 특수고용직인 택배노동자들은 각종 경비를 자비 부담하고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다. 시급으로는 최저시급 수준이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가.

지난 14일 파업노동자 중 100명은 서울 국회 앞 차디찬 길바닥 위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다른 택배사 노동자들도 작업중단을 예고했다. 소상공인이 다수 포함된 633개 화주들조차 인상된 택배비가 잘못 분배된 점을 짚으며 CJ대한통운 측이 사태 해결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사측은 당장 노조와의 대화에 임해야 옳다. 합의사항의 이행 여부를 철저히 검증받아야 한다. 정부여당도 사회적 합의의 주체다. 이행 여부를 제대로 점검하고 합의가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할 마땅한 책임이 있다. 이번에도 재벌편만 들어서는 안 된다. 다시 노동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이어져서는 안 된다.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바라는 목소리가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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