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순섭의 역사공작소] 비형과 처용, 신라의 액막이

  • 함순섭 국립대구박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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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19   |  발행일 2022-01-19 제26면   |  수정 2022-01-19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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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섭 (국립대구박물 관장)

정초이니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액막이를 살펴보자.

비형은 죽은 진지왕과 살아있는 도화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생부터 신묘한 그는 열다섯에 집사에 제수되었는데, 밤마다 궁궐을 빠져나가 귀신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에 돌아왔다. 이를 보고 받은 진평왕은 비형에게 신원사 북쪽 강가에 다리를 놓으라고 하였다. 비형이 귀신들과 하룻밤 사이에 뚝딱 큰 다리를 만들었다. 또한 정사를 도울 귀신을 추천하라 하니 길달을 데려왔다. 길달은 집사에 임명되고 각간 임종의 양자가 되었으며, 임종의 뜻에 따라 흥륜사 앞에 문루를 지었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치자 비형은 귀신들을 시켜 잡아 죽였다. 이 일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 이 이야기를 노래로 지었는데, 글로 적어 붙이면 귀신을 물리친다고 했다.

고려와 조선 기록에 비형은 목랑(木郞), 두두리, 두두을이라 했는데 경주읍 남쪽의 왕가수라는 숲에서 모셨단다. 비형이나 길달이나 모두 건축에 일가견이 있었고, 두두리라는 말 자체가 뚝딱거리는 의성어이기에 맥락이 이어진다. 두두리는 오늘날 도깨비라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귀면이라 부른 형상을 우리는 도깨비라 여겼다. 하지만 요즘 연구는 이를 용의 형상이라 판단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도깨비 형상은 사실 일본에서 오랫동안 형상화한 오니(鬼)의 모습일 뿐이다. 우리의 도깨비는 형상을 특정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노랫말을 써 붙인 듯하다.

용왕의 아들 처용은 능력을 인정받아 헌강왕의 뜻에 따라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고 급간이란 관등을 받아 신라에 정착하였다. 어느 날 마마귀신(疫神)이 어여쁜 처용 부인을 탐하였는데, 이를 본 처용은 담대하게도 해학의 노래를 부르며 돌아섰다. 이에 마마귀신은 처용의 미덕에 놀라 용서를 구하며, 처용의 용모를 그려 붙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맹세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용모를 대문에 걸어 마마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처용은 현존하는 처용무 가면과 통일신라 왕릉에 세운 무인상으로 보아 서역 계통의 이주민이라 여겨진다. 어떤 연구자는 이주한 시점이 황소의 난과 겹치므로, 외국인을 집단학살하던 난리를 피해 처용이 신라에 들어왔을 것이라 했다. 하여튼 처용설화는 능력 있는 이주민의 등용을 시샘하였던 기성권력을 비꼰 이야기이다. 모든 수모를 이겨낸 처용 이야기를 세간은 그의 신묘한 능력이라 승화시켰다.

국립대구박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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