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희화화하는 대선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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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20   |  발행일 2022-01-20 제22면   |  수정 2022-01-20 07:16
재벌의 '멸공' 윤석열의 '멸·콩'
다시 도진 무속인 비선 논란
천공스승 이어 건진법사 등장
녹취록 '정치 관음증' 부추겨
품격 실종 '황색 선거' 치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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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필자는 지독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땐 북한이 노동지옥이라고 확신했으니까. '천리마 운동' '새벽 별보기 운동' 따위가 북한의 연상(聯想) 단어였다. 하여 남한(대한민국)의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걸 다행으로 여기며 나른한 행복감에 빠지곤 했다. 관제 용어 '멸공'이란 말도 자연스레 체화(體化)됐다. 당시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남한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느 관종 재벌이 추억의 언어 '멸공'을 다시 소환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SNS 계정에 '멸공'을 포스팅하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덥석 물었다. 윤 후보는 이마트에서 장을 본 후 인스타그램에 '#달걀 #파 #멸치 #콩'을 올렸다. '달파멸콩'이라. 문재인 대통령을 깨부수고 공산당을 멸하자는 뜻이렷다. 반응은 엇갈렸다. 지지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대중 저자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렸다며 고무했다. 반대파는 군대도 안 갔다 온 자들이 철 지난 색깔론을 편다고 비아냥댔다.

윤석열 후보의 해명이 정치를 더 희화화(戱畵化)했다. '달파멸콩'이 정치적 메시지냐는 기자 질문에 집에서 자주 멸치 육수를 우려먹고 콩국을 해 먹는다고 말했다. 한데 윤 후보가 산 건 조림용 멸치와 검은 약콩이다. 조림용 멸치로 육수를 내고 검은 약콩으로 콩국을 만든다? 헷갈린다. 장계향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에도 이런 건 안 나온다. 개취(개인취향)로 치부해야 하나. 윤 후보는 해시태그를 달지 않았다고도 했는데 그럼 인스타그램의 #멸치 #콩은? 해시태그가 뭔지 모른다는 말인가.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도 대선 희화화에 일조했다. 김 전 위원장은 "내가 비서실장 노릇 할 테니 당신은 선대위가 정한 대로 연기만 해 달라"고 윤석열에게 주문했다. 연기하는 대선 후보라니…. 레이건이면 몰라도. 기사에 달린 순공감 1위 댓글을 보고 빵 터졌다. 그 댓글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제가 바봅니까? 제가 김종인 아바타입니꽈아 ~ ~ ~'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도 빼놓을 수 없다. 웹툰 제작업체를 방문한 이 후보가 '오피스 누나 이야기'라는 웹툰을 보고 "제목이 확 끄는데"라고 말해 구설에 싸였다. 배우 김부선은 "옥수동 누나는 잊었어?"라는 글을 SNS에 올리며 이 후보를 겨냥했다. 실제 김부선이 이재명보다 나이가 많다. 홍준표 의원은 이재명 후보와 배우 김부선의 관계를 '무상연애'라고 냉소했다. "보수우익이 남녀 편 가르기로 나라를 찢으려 한다"는 이 후보의 발언도 도마 위에 올랐다. '찢는다'는 말은 이 후보의 욕설 파일에 나온다.

이렇게 품격 없고 담박하지 않은 대선이 또 있었나 싶다. 윤석열 후보 측에선 무속인 비선 논란이 다시 도졌다. '王자 손바닥' 파동과 천공스승으로 떠들썩하더니만 이번엔 건진법사가 등장했다. 국민의힘 선대위 네트워크본부 실세였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김건희 7시간 녹취록 공개는 정치 관음증을 부추기고 대선의 격(格)만 떨어뜨렸다. 말초 감각을 자극하는 '황색 선거' 분위기가 물씬하다. 쥴리 명칭에 대한 그럴싸한 주석(註釋)도 나돈다. 원래는 주얼리(jewelry)였는데 자꾸 부르다보니 쥴리가 됐다나.

3·9 대선은 작품성을 중시하는 오페라와 달리 오락성에만 치중하는 통속적 오페레타 냄새가 풍긴다. 원두를 갈아 만든 드립커피가 아니라 후진 다방의 믹스커피 느낌이 강하다. 하기야 품격이 밥 먹여 주나. 싱글몰트 위스키 '발베니'의 도도한 향에 끌리지만 소맥 폭탄주의 장쾌한 맛을 잊지 못하듯 어쩌면 유권자들도 희화화하는 선거에 은근히 빠질지 모른다. 개그가 돼가는 대선, 후보 선택도 미궁에 빠지려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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