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도라 도라 도라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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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25   |  발행일 2022-03-25 제15면   |  수정 2022-03-2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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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5일 미국 영화감독 리처드 플라이셔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리처드 플라이셔라는 이름으로는 언뜻 생각나지 않아도 '도라 도라 도라'(1970), '해저 2만 리'(1952), '바이킹'(1958), '체 게바라'(1969) 등 영화 제목들을 들으면 "아! 그 사람!" 하고 기억이 나는 종합예술인이다.

'도라 도라 도라'는 일본의 1941년 12월7일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담은 영화로, 당시 일본군의 작전 암호를 제목으로 채택한 대작이었다. 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하지만 결국 상부의 지시에 따라 진주만 기습 작전을 주도한다.

공습 당일 NHK 라디오의 승전 축하 방송이 흘러나오자 일본 전역은 축제 분위기로 들끓는다. 하지만 이소로쿠 제독은 "우리가 잠자는 사자를 깨워 가공할만한 전의를 심어준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중얼거린다. 그 대사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제작사는 이 발언이 이소로쿠 제독의 일기장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공언했다. 아쉬운 점은, 제작사가 일기장을 공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에서 그 발언의 검증을 촉구할 필요는 없다. 진원지는 일본일 뿐이고, 우리에게 하등 불리한 내용은 아니다.

이소로쿠는 공연히 대미국 전쟁을 도발해 견딜 수 없는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다. 역사의 실제는 그의 걱정대로 되었다. 일본은 패전국이 됐고 여러 전범들이 처형됐다. 이소로쿠 본인도 한창 전쟁 중이던 1943년 4월18일 비행기를 타고 임무 수행 중 미군 측의 조준 포격에 당해 목숨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이 세계 최강국이 되고, 향후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한국의 독립은 영원히 물 건너갔다고 예단한 기회주의자들은 부랴부랴 친일파로 돌아섰다. 서정주는 독립 이후 발간한 자서전에 "미래의 일본 주도권은 기정 사실이니 한국인도 거기에 맞추어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친일 행위를 했노라 변명했다.

조국이 식민지가 되어 신음할 때 반민족행위를 서슴지 않은 문인의 글도 훌륭한 작품일까? 그런 글에서 문향을 느끼는 사고방식은 정상일까? 수능시험에 서정주의 시가 출제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청소년들에게 반민족행위자의 시를 암기하라고 강요하는 이 나라도 '나라'일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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