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페스트의 밤…노벨상 작가가 그린 불신의 팬데믹 시대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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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25   |  발행일 2022-03-25 제15면   |  수정 2022-03-25 21:05
35년간 전염병 소재 작품 구상한 파묵
가상의 오스만제국 내 섬 배경으로
정치·종교적 갈등 휩쓸린 사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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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소설 '페스트의 밤'에 그려지는 민게르 섬의 모습은 팬데믹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대구 수성구 대구스타디움 제3주차장에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시민들이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고 있는 모습. <영남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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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780쪽/1만9천원

천연으로 분홍색을 띠는 하얀 돌이 있는, 멀리서는 오렌지빛으로 따뜻하게 빛나는 한 섬이 있다. 이 섬은 마치 마법과도 같은 풍경을 품고 있다. 섬의 이름은 '민게르'.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곳에는 이슬람교와 그리스 정교회가 거의 같은 비율로 나뉘어 있어 정치적 긴장감이 감돈다. 이 섬에 어느 날 페스트가 퍼진다. 방역이 초점이 되어야 할 전염병은 어느 순간 정치적·종교적 갈등에 휩쓸린다.

터키 출신의 거장 오르한 파묵이 쓴 '페스트의 밤'은 어디서 본 듯한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48.56%대 47.83%'라는 제20대 대통령 선거 득표율에서도 드러나듯 대한민국도 반으로 쪼개졌다. 반으로 나눠진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 등 정부의 방역 정책을 놓고 '과학 방역'이 아닌 '정치 방역'을 하고 있다는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책은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에도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의 열한 번째 신작이다. 오르한 파묵은 35년 동안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에 대해 고민했다. 최근 5년 동안 그는 이 작품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는데, 원고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전 세계에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쓰던 소설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팬데믹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상황에서 작품을 쓰고 수정해나갔다. 역자인 이난아씨는 "오르한 파묵은 이 작품에서 음울할 수 있는 전염병 시대의 분위기를 흥미진진한 서사와 독특한 창작 기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며 '바늘로 우물파기'라는 파묵 특유의 작가 정신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고 평가했다.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역사 소설과 미스터리를 넘나들며 장대한 서사를 그려나간다. 소설의 배경인 민게르는 오스만 제국 하의 가상의 섬이다. 페스트가 확산하고 있는 이 섬에 유람선이 비밀스럽게 두 사람을 내려준다. 저명한 화학자이자 약사인 본코프스키 파샤와 그의 조수다. 정통 기독교인인 본코프스키 파샤는 오스만 제국의 큰 항구 이즈미르에서 페스트의 유행을 6주만에 종식시킨 방역 전문가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 파견된 그는 방역을 해보기도 전에 섬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된다.

이후 술탄 압뒬하미트 2세는 이슬람교도인 의사 누리를 파견한다. 누리는 압뒬하미트 2세로부터 엄격한 방역 조치를 시행하고, 방역전문가 본코프스키 파샤를 죽인 범인을 밝혀내라는 명을 받아 부인 파키제 술탄과 함께 민게르 섬에 도착한다. 그러나 행정부의 무능과 제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방역은 또다시 실패한다.

그러자 압뒬하미트 2세는 구호선을 보내지 않고, 서구 열강의 국제적 압력에 못 이겨 오스만 전함으로 민게르 섬을 봉쇄한다. 민게르 섬 출신 장교 콜아아스가 중심이 되어 민게르는 독립국임을 선언한다. 이제 전염병을 없애는 것은 오롯이 민게르 섬만의 일이 된다.

소설에는 서로 다른 상황에 부닥친 이들이 전염병이 퍼지는 것에 따라 보여주는 양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방역을 강경하게 진행하려는 정부와 방역을 거부하고 전염병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 이슬람교 대 정통 기독교, 교육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작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전염병에 다르게 반응하고, 국가는 그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소설 속 구도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저자 또한 한 인터뷰에서 "이스탄불에서 처음 코로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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