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밥 한번 먹자'와 매니페스토(manifesto)

  • 서현제 영주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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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18   |  발행일 2022-05-02 제24면   |  수정 2022-04-1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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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제 영주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언제 밥 한번 먹자고. 그러나 이런 인사성 제안(?)은 생각만큼 지켜지지 않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각자의 생업 때문에 혹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서 말이다. 이런 경험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젠 거의 상투적인 말이 되어 버린 밥 한번 먹다가 그냥 지나쳐버릴 일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곱씹어보면 우린 친분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밥을 먹더라도 액면 그대로 밥만 먹자는 않는다. 식사하면서 저간의 사정들을 소통하고, 기회가 되면 자주 만나자는 희망 섞인 말도 덧붙인다.

다시 말해 밥 한 그릇에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사회적 맥락이 들어 있다. 가족을 지칭하는 식구라는 말도 밥을 함께 먹는 일의 의미심장함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의 소위 회식 문화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식을 통해 결속을 다지거나 관계를 돈독히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중학생쯤이면 배우게 되는 국가의 기원에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이 된다. 계약이라는 것은 약속을 종이에 적어 두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아무튼 고작 밥 한 그릇이지만 밥을 먹자는 말을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비록 사적인 일일지라도 엄밀히 말해서 그 밑에는 품격과 신뢰가 깔려 있다.

지방 선거의 계절이다. 바야흐로 지역의 정가에서는 동량들이 앞다투어 출마를 서두르고 있다. 머지않아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 후보자들은 저마다 지역의 발전을 위한 자신의 소신과 공약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미리 초를 치는 것인지 모르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들 후보자가 내놓을 공약이다. 먼저 공약이 타당성이나 구체성의 면에 있어서 현실과 괴리가 있다.

다른 하나는 앞에서 얘기했듯이 공약의 이행 사항이 시쳇말로 밥 한번 먹자 식이 될까 우려스럽다. 말장난을 좀 하자면 정치인의 상당수가 공약을 어기는 걸 밥 먹듯이 한다. 나 혼자만의 기우일까. 전례로 보면 쓸데없는 걱정만은 아니다. 공약이나 정책의 질도 그렇지만 공약의 이행도 선진국에 비교해 턱없이 부족하다. 매니페스토의 잣대로 보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배경에는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관련이 있다

책임 정치나 정책선거라는 것은 실종된 지가 오래다. 그러다가 보니 우리가 소신 투표라고 부르는 것조차 후보자의 공약이나 정책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 본위로 흘러왔다.

주지하다시피 자치단체장이나 도·시·군·구 의원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고작 시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자일 뿐이다. 그들을 선출한 것이 시민이듯이 그들에 대한 통제 역시 시민의 몫이다. 다시 돌아가서 예컨대 누군가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했다면 모쪼록 밥을 먹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연하게 언젠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시간이나 장소를 특정 지을 필요가 있다.

개인이든 공인이든 그것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을 대신한다. 정치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 있어 매니페스토의 철학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현제 <영주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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