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우문우답] 당태종과 위징

  •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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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26   |  발행일 2022-04-26 제22면   |  수정 2022-04-26 07:13
중국 역사상 최고의 치적 쌓은
당태종 이세민과 직언한 위징
법 집행 정확·관대한 처리 주장
'정관의 치' 기초를 만들고 확립
열린 사고와 관용적 태도 통해
태평성세 위한 바탕 이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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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청와대 정책실장 경북대 명예교수

요즘 KBS TV에서 연속극 태종 이방원을 방영하고 있다. 태종이란 명칭은 이방원이 죽은 뒤 당 태종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당을 일으킨 고조 이연 밑에 태자는 장남 이건성이었다. 이건성 밑에 위징이라는 신하가 동생 이세민을 공격하라고 건의했으나 이건성은 듣지 않았다. 이세민이 먼저 움직여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세민이 체포되어 온 위징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쓸데없이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시켰느냐?" 위징이 답했다. "사람은 누구나 주인이 있습니다. 만일 태자가 일찍이 제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의 화를 초래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이건성에게 충성한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관중도 제 환공의 허리띠를 활로 쏘아 맞힌 적이 있지 않습니까?" 기골 있는 대답에 탄복하여 이세민은 즉석에서 위징을 사면하고 주부로 봉했다. 이세민은 황제 즉위 직후 위징을 간의대부에 임명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로 치는 당 태종의 치적(貞觀의 治)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은 위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징은 수나라가 망한 것이 세금 부담이 크고 부역이 너무 많아 민생이 피폐해진 데 원인이 있다고 보아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 하고 민생을 돌볼 것을 건의했다. 이것이 '정관의 치'의 기초가 되었다. 위징은 법을 집행할 때 정확하고 관대한 처리를 주장했다. 그는 진나라 때와 같은 가혹한 형벌을 반대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법 적용을 강조했다. 태종이 화가 나서 노조상이라는 신하를 주살했을 때 위징은 태종을 비판했고, 방상수라는 옛 신하가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났는데도 옛정을 생각해서 죄를 용서하고 비단을 백필이나 보내 선처하자 위징은 바로 직언했다. "상을 내릴 때는 관계가 소원한 사람도 잊지 말아야 하고, 징벌을 내릴 때는 측근과 귀족들에 대한 정리를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벌은 공정과 인정을 원칙으로 해야 사람들을 설복할 수 있습니다." 태종은 자신의 처사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태종은 위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명군이 되고 어떻게 하면 암군이 되는가?" 위징이 답했다. "널리 신하의 의견을 물으면 명군이 되고, 일부 사람들의 말만 믿으면 암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명군의 예로는 요순을 들 수 있고, 암군의 예는 진시황, 양무제, 수양제 등입니다."

어느 해 하남과 섬서 일대에 폭우가 내려 큰 수해가 발생했는데도 태종은 낙양에 정신궁을 수축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위징은 한걸음에 달려와 태종에 간언했다. "수나라가 그렇게 빨리 망한 것은 수양제가 정자와 누대를 축조하는 등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의 부역을 가중시켰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궁전과 누대만 해도 다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천하를 얻을 때의 어려움을 잊고 계속 궁전을 지어 화려함과 향락을 추구한다면 수나라와 똑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태종은 위징의 간언을 받아들여 궁전 수축을 중지하고 자재를 전부 수해 지역에 보내 백성들의 집 짓는 데 사용토록 했다. 태종이 제일 듣기 싫어한 말이 '수양제 같다'는 말이었다.

위징의 직언은 유명하다. 그는 늘 직언으로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어느 날 태종이 또 위징의 직언을 듣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내전에 들어와 이렇게 외쳤다. "또 조정에서 나를 모욕했으니 저놈의 영감탱이를 오늘은 죽이고야 말겠다." 그러자 장손황후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잠시 뒤 황후의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태종에게 큰절을 하며 말했다. "감축드립니다. 자고로 명군 밑에는 바른 말 하는 신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위징 같은 신하가 있다는 것은 폐하가 명군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태종은 기분이 좋아져 없던 일로 했다(2005년 2월 참여정부 2주년 기념 청와대 오찬에서 나는 건배사로 이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얼마 뒤 청와대를 떠나 경북대로 돌아왔는데, 그 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농담을 가끔 했다고 들었다. '요즘 청와대에 위징이 너무 많아 일하기 힘들어').

장손황후는 아깝게도 신병으로 요절했다. 임종 석상에서 태종에게 말하기를, "저의 친정은 요행히 고관 자리를 얻고 있으나 실력으로 된 게 아니므로 아무쪼록 자손을 위해서라도 요직에는 앉히지 마십시오. 저는 평생 남을 위하여 도움 되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죽을 때만은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장례를 위해 재물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무쪼록 훌륭한 인물을 아끼고, 충간을 잘 받아들이고, 토목사업을 적게 하고, 사냥을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만 약속해주신다면 저는 안심하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독약을 꺼내 태종의 얼굴을 한참 본 뒤 말을 이었다. "만일 폐하께서 먼저 돌아가시게 되면 이 독약으로 폐하의 뒤를 따를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독약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36년의 짧은 생을 마쳤다. 장손황후는 외유내강의 전형이었다.

정관 16년, 위징이 죽자 태종은 이렇게 탄식했다. "내게는 세 개의 거울이 있었다. 얼굴 보는 거울, 역사라는 거울, 사람이라는 거울이 그것이다. 오늘 그중 하나를 잃었다." 위징이 죽고 2년 뒤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고구려의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을 60일간 포위공격했으나 실패했다(나는 어릴 때 '안시성의 꽃송이'라는 영화를 보고 용기백배했던 기억이 난다). 차차 날씨는 추워지고 전세가 불리하여 결국 태종은 철군을 결정했다. 태종은 돌아오는 길에도 죽을 고생을 했다. 이때 당태종이 말하기를 "아,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성군이 나오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君明后賢臣直. 명철한 왕, 현명한 왕후, 곧은 신하. 우리는 어떠한가.
전 청와대 정책실장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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