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한류의 보편성과 정신의 임신

  •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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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3   |  발행일 2022-05-03 제22면   |  수정 2022-05-03 07:09
전세계인의 공감 불러일으킨
韓대중예술 민족의 경계 넘어
他이념 바탕으로 새 정신 잉태
한국적·보편적 삶의 이상 제시
적대적 대립 너머 새 세계 지향
한류 통해 통합의 세상 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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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모든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든 삶을 모방하면서 어떤 이상화된 삶을 형상화해 보여준다. 그러나 한 편의 드라마가 그려 보여주는 이상화된 삶의 모습이 언제나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드라마가 그려 보여주는 이상화된 삶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낀다. 더러는 윤리적 이유 때문에, 더러는 낯섦이나 이질감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거부감이 두려워, 어떤 드라마가 오로지 친숙한 것만 보여준다면, 그 역시 관객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드라마가 보편적 공감을 얻으려면, 한편에서는 낯설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되, 동시에 그 낯설고 새로운 것을 친숙함 속에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 기억 속에서 그런 작품을 찾아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오래전 보았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이다. 나 같은 한국인에게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낯선 세계지만, 그가 그려 보인 이란 사람들의 삶의 풍경은 너무도 따뜻해서 지금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특정한 민족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다른 문화권에 소개될 경우, 문화적 배경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외래적 작품은 공감을 얻기 어려워진다. 내 경우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이 그랬는데, 한참 일본어를 배우던 시절이라 충분히 호의를 가지고 읽었음에도, 나는 그 소설에 배어있는 삶의 감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가끔 외부에서는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가리켜, 한국은 국내시장이 작아 처음부터 외국에 수출하기 위해 만들기 때문에 잘 팔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는 판단이다.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작가들은 애써 세계시민 흉내를 내지 않는다. 그들이 다루는 소재도 그들이 그려 보이는 삶의 풍경도 대개 너무도 한국적인 것들이다. 게다가 대사 역시 너무도 한국적이어서 저걸 어떻게 번역하나 싶은 것들이 허다하다. 그렇게 그들은 한국적인 현실을 재현하면서 남들을 애써 이해시키려 하지도,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한국적 현실을 애써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에게 친숙한 것을 자기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그런데도 그것이 남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준다. 키아로스타미가 나를 감동시킨 것을 생각하면, 봉준호 감독이 남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란의 영화가 세계적인 흐름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중 예술은 어떻게 그 많은 작품으로 전세계적인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을까?

까닭은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그려 보여주는 삶의 이상이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대중 예술가들이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러나 아무나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오랫동안 세계사의 변방에서 거의 이름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인들이 그런 보편적인 주체성을 구현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우리는 오랫동안 남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채 살아왔다. 신채호는 '낭객의 신년만필'에서 말했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이 땅에서 철학은 너무도 오랫동안 남의 나라 철학의 수용과 학습이었을 뿐, 자기 고유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주체적 활동이 아니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런 사정을 비판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자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렇게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자는 예전에 도쿄를 우리 서울로 하자던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평생 서양 철학의 언저리에서 철학을 공부해온 나는, 이런 정신적 식민성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로크를 믿고 마르크스 레닌을 믿는 것이 우리끼리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죽여야 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리가 남들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것이 우리의 일면적 어리석음이 아니라, 남의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정신의 겸손과 남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줄 아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함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더러는 석가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더러는 공자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며, 더러는 로크에게서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에게서 자기를 잃어버려 왔던 역사는 뜻 없는 자기 상실의 역사가 아니고, 타자적 정신과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정신을 잉태하기 위해 겪은 임신한 정신의 입덧이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정신이란 새로운 삶의 이상이다. 세계는 여전히 적대적 분열 속에 있고,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렇게 분열된 삶의 파편 가운데 어떤 것도 참된 우리의 모습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예술가들은 그 조각난 파편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파편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삶의 이상을 추구해 왔다. 제국주의적 침략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비극적 역사로부터 자라 나온 한국의 드라마는 폭력과 적대적 대립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지향해 왔던 것이다.

유럽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현실은 서양적 삶의 이상이 파산했음을 보여준다. 계몽주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전쟁을 막지는 못한다. 이제 다른 삶의 이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더는 그들로부터 우리에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이제 우리가 열어야 할 과제이다. 한류의 확산은 그 새로운 세계의 전조라고 나는 믿는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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