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대구 달성군 비슬산 3대 사찰, 대견사·유가사·용연사

  • 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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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6 07:53  |  수정 2022-05-06 08:01  |  발행일 2022-05-06 제12면

산을 오르는 재미 중 하나는 명산 곳곳에 자리 잡은 사찰을 만나는 일이다. 대웅전을 향할 때 불어오는 산바람, 고요한 사찰 아래 수행 중인 승려와의 인사 등 그곳을 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전국 명산마다 유명 사찰이 자리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곳이 대구시 달성군 비슬산이다. 비슬산 3대 사찰로 손꼽히는 대견사, 유가사, 용연사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고즈넉한 사찰 풍경이 일품이다. 김문오 달성군수는 "그동안 민족정기회복과 불교 문화재 복원에 온 힘을 쏟았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뒀다"며 "이제 달성군 비슬산 3대 사찰은 전국 그 어떤 사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명성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대견사
대구시 달성군 비슬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대견사' 전경. <대구 달성군 제공>

    대견사   


당나라 문종이 탐냈던 명당에 자리
일제때 강제폐사 후 100년만에 복원


영친왕 즉위 축하 중건 뒤 폐허
달성군 2014년 3월 다시 문열어
절 내 석상이 땀 흘렸단 기록도

대견사(주지 법희 스님)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 당시 창건한 사찰이다.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비슬산 정상 1천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절을 지을 곳을 찾았는데, 하루는 얼굴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해 찾게 했다.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 찾아낸 곳이 대견사 터다.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고 해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로 명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1416년(태종 16)과 1423년(세종 5)에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됐다. 1900년 영친왕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이재인(李在仁)이 중창했지만,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해 1917년 다시 폐허가 됐다. 2011년 11월 달성군에 의해 대견사 재건 공사가 진행됐고, 2014년 3월 적멸보궁·요사채·산신각·목조와가 등 건물 4동이 완공됐다. 이로써 대견사가 폐지된 지 100여 년 만에 다시 복원된 셈이다.

현재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30m, 높이 6m의 축대가 남아 있고, 무너진 9층 석탑과 거대한 석조선각불상,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洞窟臺座) 등이 있다. 이 중 축대는 현재까지 온전히 보존돼 있으며,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도량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사
대구시 달성군 비슬산에 자리한 유가사 전경. <대구 달성군 제공>

    유가사    

전성기엔 승려 3천명 거주 대종찰
비구니 수행도량인 수도암도 유명


조계종 제9교구 동화사 말사
환란 때 소원 빌던 괘불 유명
사찰 일대의 등산코스도 인기

대구시 달성군 비슬산 천왕봉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유가사(瑜伽寺·주지 도휘 스님). 유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말사로, 827년(신라 흥덕왕 2) 도성(道成)이 창건했다. 이후 889년(진성여왕 3) 원잠(垣岑)이 중창했으며, 1047년 학변(學卞)과 1452년 일행(逸行)이 각각 중수했다. 전성기엔 3천명의 승려가 거주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1682년 도경(道瓊)이 대웅전을 보수했고, 1729년 취화(就和)와 파봉(巴峰), 1760년 보월(寶月), 1776년 밀암(密庵), 1797년 낙암(洛巖)이 각각 중수·중창했다. 1976년부터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대웅전과 용화전·산령각·범종루·천왕각·백화당·나한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측면 각 3칸으로 내부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본래는 영산회상후불탱화와 지장탱화·괘불이 남아 있었으나 1993년에 도난당했다. 현재는 사진을 복사한 것이 걸려 있고, 1964년 우송(友松)이 제작한 칠성탱화와 신중탱화가 함께 모셔져 있다. 용화전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내부에 높이 102㎝인 석조미륵불좌상이 있다.

유물은 괘불과 삼층석탑, 낙암과 월호(月湖) 등 15인의 승탑이 서 있다. 유가사 일대는 등산코스로도 유명하다. 유가사에서 북서편으로 500여m 떨어진 곳에 수도암이 나온다. 수도암은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이름 높다. 극락전, 천태각, 산령각, 두 요사채가 있는 아담한 암자다.

용연사
대구시 달성군 용연사 경내 모습. <대구 달성군 제공>

   용연사   

사명대사 명으로 중창한 호국사찰
부처 진신사리 갖춘 적멸보궁 명성


통일신라시대 승려 보양 창건
석조 계단·삼층석탑·부도 등
보물·문화재 자료 다수 소장

용연사(주지 능도 스님)는 달성군 옥포읍 비슬산(琵瑟山) 자락에 있다.

창건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승려 보양(寶壤)이 했다. 그 뒤 고려시대까지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419년(조선 세종 1) 천일(天日)이 중건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다. 1603년(선조 36) 탄옥(坦玉)·경천(敬天) 등이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명으로 중창했다. 1621년(광해군 13) 범종각을 지었지만, 1650년(효종 1)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했다. 1655년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1660년(현종 1)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했다.

1670년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됐고, 1673년에는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세웠다. 1722년(경종 2)에는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했고, 당시 절 규모는 200여 칸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주하는 승려는 500여 명에 달했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과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삼층석탑, 극락전, 부도군 등이 있다.

강승규기자 ka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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