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인간의 에고이즘

  • 박승주 대구경북학연구센터 대구읽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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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9   |  발행일 2022-05-09 제25면   |  수정 2022-05-09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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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주 대구경북학연구센터 대구읽기대표

얼마 전 서가를 정리하다 우연히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의 한국어판 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연구자들의 번역 내용이 어떤지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꺼내 펼쳐 보다가, 인간의 추악한 내면과 에고이즘에 천착한 작가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거의 무명이던 시절에 집필한 작가의 초기작 '라쇼몽(羅生門)'(1915)을 골라 읽었다.

라쇼몽은 9쪽 분량의 단편소설이지만 인간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일본에서는 거의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걸작이다. 소설 내용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 새삼 이 소설에 다시 눈이 가게 된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수많은 미디어와 SNS를 통해 사람들의 칼날 같은 분노와 '내로남불'식 이중 잣대를 목격하며 나 자신을 위시한 인간의 에고이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라쇼몽'이라는 제목을 들으면 혹자들 중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영화는 소설의 제목과 무대만 차용했을 뿐 스토리는 전혀 다르다. 소설의 내용은 헤이안시대(794~1185)라 불리던 시기에 교토의 스자쿠대로(朱雀大路)남쪽 끝에 있는 라쇼몽(2층 누각이 있는 도성 정문)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교토는 지진과 회오리바람, 화재와 기근 등의 재앙이 2~3년간 이어져 장안이 너무나도 피폐해진 탓에 라쇼몽도 사람들이 송장을 버리고 가는 을씨년스러운 장소가 되어 버렸다.

어느 날 해질 무렵 하인 한 명이 라쇼몽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주인집에서 해고된 신세였다. 사내는 앞날을 걱정하며 굶어 죽을지, 도둑이 될지를 고민하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기 위해 누각 위를 살폈다. 그러다 방치된 여러 구의 시체들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서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노파를 발견한다. 시체를 대상으로 한 노파의 도둑질에 극렬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느낀 사내는 힘으로 노파를 제압하고 그녀의 악행을 매섭게 추궁한다. 그 사내는 노파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도 도둑이 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노파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분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놀라서 바들바들 떠는 노파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생사여탈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판단한 순간, 사내는 증오심보다는 일종의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한편 사내에게 자신의 악행을 추궁당한 노파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죽은 자의 생전 악행을 들먹이며 당해도 싸다고 폄훼하는 한편, 자신의 행동에 대해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를 듣고 있던 사내는 노파가 하는 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신세"라며 노파를 쓰러뜨리고 가진 것이라곤 걸친 옷 하나밖에 없는 남루한 노파의 옷을 빼앗아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린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라쇼몽'의 문학적 가치를 운운하기 이전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내와 노파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인간상이 겹쳐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도둑심보에는 눈을 감고, 타인의 도둑질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분노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요즘 유행어로 '내로남불'식 에고이즘의 발현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에고이즘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도 불변하는 감정인 모양이다.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설파했듯, 백여 년 전 일본 근대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오늘도 나는 내안의 '내로남불'과 에고이즘을 경계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박승주 대구경북학연구센터 대구읽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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