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경상도 부임 관찰사, 노론 탐관의 가혹한 징세·수탈 들끓어…경상도 고을 15곳서 전국최다 농민봉기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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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20   |  발행일 2022-05-20 제35면   |  수정 2022-05-2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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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민란'이라 부르는 농민봉기는 진주에서 처음 일어나 전라도를 거쳐 충청 경기지역까지 확대됐는데 민란이 일어난 고을 수를 살펴보면 경상도 15개, 전라 6개, 충청 2개, 경기 4개로 노론 근거지인 기호 충청지역보다 경상도가 훨씬 많다. 고을 수령의 탐학이 경상도에서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농민 봉기가 일어난 고을 분포.
조선 개국부터 구한말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이는 615명이다. 인조반정 이전에는 영남 인물이 경상도 관찰사를 많이 지냈다. 경주 양동마을의 손중돈, 예안의 이현보, 봉화 닭실의 권벌, 경주의 이언적, 안동의 류성룡, 김성일, 홍이상, 상주의 정경세 등이 그들이다. 조선 후기에는 정권을 장악한 노론 관리들이 경상도를 다스렸지만 당색이 다른 영남 사족들은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관찰사와 왕래를 삼갔다.

조선 시대는 학연·지연 혼인으로 인연을 맺어 대대로 세의와 세교를 다져온 씨족사회이다. 하지만 이 백여 년을 척지면서 지내온 영남사민(士民)과 노론 관찰사 사이에 목민 선정으로 치적 쌓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가혹한 세금 징수로 농민 봉기가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은 경상도였고 팔도 관찰사 중 천주교도를 가장 많이 옥사시키고 참형한 이도 경상도 관찰사였고 동학 교주 최제우를 효수한 곳도 경상감영 관덕정이었다. 징청각에서 풍악 소리가 넘쳐흘렀다고 뜻있는 선비들이 비꼬았고 가장 먼저 읍성을 허물고 감영을 몽땅 일제에게 내준 골수 친일관리도 경상도 관찰사였다.

◆경상도 영주제명기(營主題名記)

경상도 영주제명기는 1078년 고려 문종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경상도 관찰사 명단을 수록한 책이다. 경주박물관과 상주향교 소장본이 있으며 현재 보물 문화재다. 1426년 세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하연이 처음 만들어 몇 차례 추록을 거쳐 완성했고 현재 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표제가 '당하제명기(棠下題名記)'이다. 당시 경상감사가 경주부윤을 겸하고 있어 경주부가 소장한 듯하고 1718년 숙종 때 관찰사 이집까지 640년간 명단이 수록돼 있다.

상주향교 소장본은 하연의 경상도 영주제명기를 저본으로 하여 1622년 광해군 때 김지남이 만들었다. 표제는 도선생안(道先生案)이다. 도선생안은 1078년 이제원 관찰사부터 1886년 고종 때 이호준 관찰사까지 800여 년간 영백(嶺伯)을 지낸 인물이 수록돼 있다. 조선전기 감영이던 상주목이 소장하고 있었고 현재 상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렇듯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옛날에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닿을 수 있는 변방 경상도 영주(營主)는 행정 사법 병권을 가져 위세가 대단했고 고려 시대에는 절도사 안찰사 안렴사로, 조선 시대에는 관찰사·감사·도백·방백·영백이라 불렀다.


영남 인재양성 교육기관 낙육재 건립
경상감영 공원에 세워진 선정비 29개
대구판관 이서, 신천 물길 돌려 치적

남인 근거지 영남에 노론 관리가 부임
기근이 든 해, 세금 면제·경감도 불리
착복한 돈·물품 향리로 바리바리 실어
암행어사에 비위 적발된 지방관 급증
감영 장대서 동학교주 최제우 효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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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향교 내에 복원한 낙육재.
◆경상감영 교육기관 낙육재(樂育齋)

조선후기 조정 출사가 어려워진 영남 선비들이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소론 온건파 관찰사 조태억이 1721년 경종 때 경상도 인재양성을 위해 감영 내에 낙육재란 교육기관을 세웠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주장한 지방 교육의 필요성과 감영 중심 교육을 적극 받아들여 만들었고 낙육(樂育)은 '천하의 인재를 가르치는 즐거움'으로 맹자의 군자삼락에서 따왔다. 읍성 남문밖에 건물을 짓고 유생 15명을 선발하여 1년간 낙육재에 기숙하면서 강독과 제술을 공부하게 했고 운영비는 10여 곳에 학전(學田)을 마련하여 조달했다.

10년 뒤 1730년 관찰사로 부임한 조현명은 낙육재 활성화를 위해 여러 영남 인물을 만났는데 그중 한 사람이 상주의 대학자 식산 이만부였다. 조현명은 식산에게 조언을 구하여 낙육재 활성 방안을 마련하고 조정에 낙육재를 통한 경상도 인재 육성책을 올렸다. 영조는 영학(營學)으로 공인하고 대학, 근사록, 심경 등의 책을 하사했고 서당-향교-낙육재-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공교육이 실시됐다.

1807년 순조 때 대화재로 경상감영 관아 건물이 소실돼 재건하면서 윤광안 감사는 낙육재 강당, 서고, 기숙사를 증축하고 도서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있다. 갑오개혁으로 낙육재 운영이 폐지될 때까지 170여 년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인물이 450여 명이었다고 하니 크게 활성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낙육재 소장 서적은 상당수가 유실됐고 현재 764책이 대구시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시립중앙도서관의 고문헌실 이름이 낙육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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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가 지난해 재현한 태평성대 경상감영공원. 상주시 복룡동 165-9 일원(부지면적 6만5천114㎡)에 조성된 경상감영공원은 2013년 첫 삽을 뜬 지 8년 만에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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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 대구판관 이서의 선정비.
◆치적과 선정비

옛글에 목민관은 떠나고 난 뒤 다시 그 고을을 지날 때 백성들이 반갑게 맞아 항아리에 밥과 찬이 가득하면 말몰이꾼이 빛난다고 했다. 인조 때 백강 이경여가 경상감사로 왔을 때 병자호란 직후라 굶주리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는데 백강은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풍악과 기생을 물리쳤으며 가마를 타지 않고 일산을 받치지 않았다. 오로지 죽은 이를 조문하고 고아를 거두고 백성을 위로하여 다시 돌아와 편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급무로 삼았다고 목민심서에서 선정을 베푼 경상감사로 꼽았다. 그는 훗날 영의정에 오른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와 소론의 명재상 조현명이 영조 초기 이인좌 난 직후에 경상감사로 내려왔는데, 영남 인물들을 반란 동조 세력으로 엮어 처벌하려는 조정의 노론 세력에 맞서 끝까지 영남인을 비호하고 자존심을 지켜 준 이야기가 영조실록에 가득한데 조선 후기 영남인에게 가장 우호적인 관찰사인 듯하다.

경상감영공원에는 선정비가 29개 있다. 예로부터 목비(木碑)는 찬양하는 것과 아첨하는 것이 섞여 있으니 세우는 대로 바로 없애 치욕에 이르지 않아야 한다고 했지만 고을마다 석비(石碑)가 넘쳐났고 경상감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 상동교 옆에 세워진 대구판관 이서의 선정비는 신천의 가창천 물길을 돌려 읍성 내 홍수를 방지한 치적을 새긴 비로 진실로 대구부민의 마음을 담은 선정비이다.

◆선호도가 높지 않은 경상도관찰사

경상도는 고을이 많고 백성도 많아 외직으로 근무하기 좋은 곳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노론 세력 근거지인 경기나 충청감사, 중국과 교역 길목인 평양감사보다 선호도가 낮았다. 갑술환국 이후 노론 집권층과 남인 영남 사족 간 교유가 끊어져 혼반은 물론 행장이나 묘갈로 세의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부임해 오는 관찰사는 적소처럼 적적했고 영남 큰선비는 공식적인 행사 외에 접촉을 삼갔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수령은 단지 '과객(過客)으로 고을을 다스렸다'고 했고 영남선비의 그 많은 문집에 관찰사를 의미하는 영백(嶺伯)이나 방백(方伯)이란 단어는 거짓말처럼 찾기 어렵다.

실제로 경상도관찰사 보임을 둘러싸고 1735년 영조10년에 큰 인사 참사가 일어났다. 정우량, 유복명, 권업, 서명빈, 이렇게 네 사람의 노론 관리가 잇달아 관찰사 보임을 회피했다. 부모봉양, 대간반대, 영남유생 반목 등의 사유였다. 화가 난 영조는 인사 담당인 이조판서, 참판, 참의를 모두 외직 수령으로 좌천시켰고 이조판서 김재로에게 '직접 내려가 한번 해보라고'하며 관찰사로 발령냈다. 김재로는 영조의 최고 총신(寵臣)으로 정승 20년에, 아들 김치인까지 부자 영의정을 지냈지만 대를 이어가며 영남에게 비우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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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주 최제우 초상.
◆농민봉기의 진원지가 된 경상도

노론 관리가 남인 근거지인 영남에 관찰사로 계속 부임해 옴에 따라 경상도는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듯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근이 든 해에 조정이 취한 세금 면제 내지 경감 조치는 노론 지지 기반인 경기도나 충청도에 비해 경상도가 통례적으로 훨씬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14장1 인용)

'임술민란'이라 부르는 농민봉기는 진주에서 처음 일어나 전라도를 거쳐 충청 경기지역까지 확대됐는데 민란이 일어난 고을 수를 살펴보면 경상도 15개, 전라 6개, 충청 2개, 경기 4개로 노론 근거지인 기호 충청지역보다 경상도가 훨씬 많다. 고을 수령의 탐학이 경상도에서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순조 이후 암행어사에게 비위가 적발돼 파면당한 경상도 지방관 수를 보면 영남이 민란의 진원지임을 알 수 있다. 영·정조 치세에는 지방관 비위가 거의 없었고 순조 재임 시 4번의 암행어사를 파견했는데 파직 지방관 수는 15명-21명-24명-30명으로 점차 증가 되다가 헌종 때 38명, 1854년 철종 때는 57명에 달했다. 경상도 71개 고을 수령이 반 이상 비리로 파직됐다. 영남에는 이미 천하의 도(道)는 사라지고 탐관(貪官)의 가혹한 수탈만 들끓었다.

순조 때 암행어사로 내려온 이우재는 경상감사 비위를 열거하면서 조령을 넘자마자 관찰사 탐욕 소문을 귀 따갑도록 들었고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침을 뱉어가며 욕하고 분개했으며 여항(閭巷)의 노래를 비위로 지어 불렀고 착복한 돈과 물품을 향리로 바리바리 실어 날랐다고 했다. 그래서 관찰사 한번 하면 '5대 후손까지 배부르게 먹고 산다'는 말이 나왔다.

◆전근대 역사의 현장 경상감영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개항이 되기 전 전근대에 경상감영에서는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순조 즉위년에 구미 '인동 작변'을 역모로 조작하여 노론 벽파가 정조 우호 세력인 영남인을 척결하는데 앞장 선 인물은 김이영 관찰사였고,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때 경상도 산골짝에 숨어있던 천주교 신자를 잡아들여 수 십 명을 옥사·참형하여 한티를 천주교 성지가 되게 한 이는 이존수, 정기선 관찰사였다.

1864년 동학 교주 최제우를 경상감영 관덕정 장대에서 효수시킨 이는 서헌순 관찰사였다. 선화당과 징청각을 재건한 윤광안 관찰사와 대구읍성을 증축한 김세호 관찰사도 모두 암행어사에 의해 파직됐다. 전국에서 읍성을 가장 먼저 허물고 골수 친일관리의 으뜸 인물은 박중양 관찰사였다. 백성은 곧 하늘이라 했거늘 이렇듯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목민관은 오욕만 남긴 채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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