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우광훈의 장정일 傳] (2) 장정일, 여전히 도망 중인 소년…문명의 어둠에 숨은 시인에게 바친 헌사

  •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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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27 07:48  |  수정 2022-09-02 07:40  |  발행일 2022-05-27 제15면
장정일 詩 다 외우다시피 한 대학시절
그의 시구 활용해 동인지에 짧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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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장정일이 국내외 문학 작품과 인문교양서 등을 엄선해 읽고 그날그날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담백하게 기록한 책이다.

장정일이란 시인을 알게 된 후, 난 항상 그의 이름을 품에 안고 살았다. '살았다'는 것은 정말 정확한 표현이다. 물론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교 후면, 난 동성로 제일서적으로 달려가 그곳에 꽂힌 책들을 ㄱ부터 ㅎ까지, A부터 Z까지 차례로 독파해 나갔다. 그렇게 나만의 보석을 발견하는 것, 그것만이 그 당시 내 삶의 유일한 존재이유였다.

스물두 살, 나의 소원은 시인 오규원씨를 '할아버지'라고, 시인 박남철씨를 '아저씨'라고, 시인 장정일씨를 '형'이라고 불러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중 한 가지를 고르라면 단연코 '장정일 형'이었다. 그 시절, 난 그렇게 그의 시를 모두 외우다시피 했고,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에 등장하는 그의 벗들을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상철이가 동인지 '비상구 3호'에 실을 원고를 부탁했고, 난 호기롭게 아래와 같은 제목의 장정일씨의 시에 관한 짧은 글을 썼다. 나는 이제 막 스물세 살이 되려 하고 있었다.

장정일, 여전히 도망 중인 소년

시인 장정일에게 있어 현대는 <동성연애자, 보험가입자, 개업한 정신과 의사 따위가 우리들의 배우>이고, <우리들에게 맡겨진 배역>이며, <풍경이 지루하고 짜증스레 멈춘> <벽보>와도 같은 그로테스크한 세계이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아무도 이러한 경기를 중단시키지 못하는> 불문율만이 그의 일상 앞에 잔인하게 도사리고 앉아있다.

이러한 세계 안에서 문명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과 동격이 되며, 그 폐쇄적인 공간 속에 에워싸인 그의 하루는 <연극 전용회관에서 입장권을 만지작거리>고, <휘황찬란한 100촉 전기가 불 밝히고 늘어선 문명의 무덤인 지하상가>를 거닐며,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로> 되돌아가는 무기력한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솔직한 내면고백 <도망가서 살고 싶다>를 통해 <황급히 구원의 수화기를 들어보지만>, <문명은> 여전히 <통화중>이며, 결국 <상상할 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이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의 세계', 이것이 바로 장정일의 근원적인 절망의 원인이며, 파격적인 상상력의 원동력이 된다.

불경과 외설의 카오스, 그렇게 그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진다. 이제, 그가 품었던 모든 희망은 <무거운 짐이>된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쥐를 찍어내는 주형 속으로 들어가듯> 문명의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린다.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타자기를 두드려 대는> 것뿐이다. 그는 랩을 지껄이듯 날카로운 풍자로 모든 것을 비하시킨다. 문명과 이념과 사상,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그는 <우표수집가가 자신의 스토크 북 속에 없는 볼리비아산 나비 우표를 간직하고 싶어 하듯> 자신의 기이한 상상력을 거침없이 토해낸다. 그러나 이 밑도 끝도 없는 공상과 요설에 대한 욕망은 결국 자신의 무력함을 반증하는 농담이 된다.

그는 깊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8미리 스타>가 되어, <이제는 그녀가 영화를 찍는 것인지 영화 속의 그녀가 그녀를 대신 사는 것인지> 모를 지경에 다다른다. 그는 이제 한 대의 고성능 <티브이>일 뿐이며, 지독한 암흑 속에서 순간순간 고감도의 스트로브를 터뜨려대는 하이엔드 카메라일 따름이다. 그에게 있어 삶의 인식이란 결국 자기모멸로 가득한 농담의 연속이며, <티브이와 눈싸움>을 하듯, 아니 <요리책>을 보며 <요리를 하듯> 시를 생산해내는 것뿐이다. 무엇을 바꾼다거나, 변화시킨다는 행위는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호소한다. 몽상, 그 무기력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결국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자, 반항이라고. 그리고 그는 여전히 <도망중>이다.

* < >안에 있는 내용들은 장정일의 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민음사)'과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민음사)'에 나오는 시구(詩句)들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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